다시 겨울이 오면
하얗고 단조로운 병실 천장은 매일 밤 같은 모양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며칠 밤을 새운 듯한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창문을 넘어 들어올 때면, 하윤은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깨어났다.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운 요즘, 그녀의 세상은 침대 위 좁은 공간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빌딩 숲은 차갑고 무심하게 뻗어 있었고, 그 사이를 스치는 겨울바람은 그녀의 마른 창문을 흔들었다.
침대 옆 협탁에는 작은 수액 봉투와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뭉툭한 손가락으로 사진을 들어 올리자, 얇은 종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속 스무 살의 하윤과 지훈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날, 남산 타워 아래서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녀의 붉어진 코끝과 지훈의 환한 미소 위로 자잘한 눈발이 흩뿌려져 있었고, 그들의 머리칼과 어깨에는 순백의 눈송이가 내려앉아 있었다.
“하윤아, 어떤 눈보라가 쳐도, 어떤 긴 밤이 찾아와도, 우리는 다시 이 눈꽃 아래서 만나자.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서로의 곁으로 돌아오는 거야.”
그날, 지훈의 목소리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 약속은 하윤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박혀, 지난 십 년간 그녀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지훈이 연구 때문에 해외로 떠났던 지난 3년 동안, 그 약속은 그녀가 홀로 견뎌낸 수많은 밤의 등대였다. 하지만 지금, 병원 침대에 누워 힘없이 천장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그 약속은 너무나 멀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얼어붙은 시간의 조각들
“하윤아, 정신 좀 들어?”
낮게 깔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하윤은 겨우 눈을 떴다. 혜진이었다.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때로는 지훈과의 관계를 질투하기도 했던, 복잡한 인연의 실타래 같은 친구. 혜진은 탁자 위에 따뜻한 보온병과 과일을 내려놓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윤을 바라봤다.
“응… 언제 왔어?” 하윤의 목소리는 얇고 쉬어 있었다.
“조금 전에. 네가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어. 그런데, 지훈이한테는 연락 했어? 아직 모르는 것 같던데.” 혜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괜히 짐만 될 뿐이야. 지금 제일 중요한 시기잖아, 그의 연구가.”
혜진은 한숨을 쉬었다. “네가 이렇게 아픈데, 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둘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 아니었어? 그가 알면 당장 달려올 텐데…”
“달려와서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이렇게 무너진 모습을 보이는 건 싫어. 그에게는 언제나 빛나고 강한 모습이고 싶었어. 그런데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윤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지훈이 해외로 떠나기 전, 그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하고 절박한 것인지 들었던 하윤은, 자신의 병을 알리는 것이 그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약속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지훈의 꿈을 응원하는 든든한 존재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을 지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이 그녀를 짓눌렀다.
혜진은 하윤의 손을 꼭 잡았다. “하윤아, 그게 사랑이야. 서로의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함께 견뎌내는 게. 혼자 아파하지 마. 지훈이 알면 정말 마음 아파할 거야.”
그때,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문틈으로 스며들어왔고, 그와 함께 낯익은 그림자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윤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지훈이었다. 그의 코트 어깨 위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꽃이 희미하게 앉아 있었다. 마치 그날의 약속처럼, 겨울 눈꽃을 몰고 온 듯이.
지훈의 눈빛은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수척해진 하윤의 얼굴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혜진은 지훈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지훈은 천천히 하윤의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은 몹시 조심스러웠고, 그의 그림자는 하윤의 침대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하윤은 눈물이 차오르는 시야 속에서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얼굴, 하지만 동시에 외면하고 싶었던 얼굴.
“하윤아…”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하윤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말할 필요 없었어. 너에게 방해만 될 뿐이라고 생각했어.”
“방해? 네가 이렇게 아픈데, 그게 방해라고? 너 없는 내 연구가 무슨 소용인데? 네가 내 삶의 전부인데…” 지훈은 결국 무릎을 꿇고 하윤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하윤의 손을 감싸자마자 떨림이 전해졌다.
“미안해, 하윤아.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나는… 나는 네가 잘 지내는 줄만 알았어. 혜진이한테서 소식 듣고, 미친 사람처럼 뛰어왔어.” 지훈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았어. 너를 혼자 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하윤은 지훈의 차가운 손을 감싸 안았다. 그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기에, 그녀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물을 보자, 억눌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지훈아… 나는… 나는 더 이상 네 곁을 지킬 자신이 없어. 나는 약해지고 있어. 이제는… 네가 꿈꾸던 나의 모습이 아니야.”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지훈은 고개를 들고 하윤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아니야, 하윤아. 너는 언제나 나에게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야.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기억나?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의 곁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지만, 동시에 변치 않는 믿음을 담고 있었다. 하윤은 그 믿음 속에서 얼어붙었던 심장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함박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눈송이들이 병실 창문을 두드리며, 그들의 약속을 속삭이는 듯했다.
“지훈아…” 하윤은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나… 나 괜찮을 수 있을까?”
지훈은 하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물론이지. 우리는 해낼 거야. 함께. 그때처럼.”
병실 안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곳에서는 오래전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따뜻한 온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아직 많은 고난이 남아 있을 테지만, 이 약속 앞에서 그들은 다시 한번 서로의 등대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병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은, 그들의 희미한 희망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