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공상과학)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고요

“지훈. 에너지 셀 잔량, 7퍼센트. 산소 필터 수명, 3시간.”

작은 드론 카이의 기계음이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헬멧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지훈은 낡은 방진복의 목깃을 한번 더 끌어올렸다. 눈앞은 온통 회색이었다. 한때는 스카이라인을 자랑했을 고층 빌딩들이 이젠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재의 바다 속에서 거대한 비석처럼 서 있었다. 지독한 먼지가 시야를 가로막았고, 몇 걸음 앞의 폐허조차 희미한 윤곽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7퍼센트라니, 벌써 그렇게 됐나.”

지훈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탐색기의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이대로라면 밤을 넘기기 전에 보급 기지로 돌아가기도 힘들 터였다. 아니, 애초에 ‘보급 기지’라고 부를 만한 곳이 남아 있기는 한가. 그저 바람을 피하고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임시 거처일 뿐이었다.

“새로운 신호 감지. 북서쪽 300미터 지점. 금속 반응, 고밀도.”

카이가 공중에서 나지막이 윙 소리를 내며 방향을 가리켰다. 카이는 지훈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눈과 귀였다. 과거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이 작은 드론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놀라운 성능을 발휘했다.

“금속? 무슨 금속?”

지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재의 도시에서 금속이라 함은, 대개는 썩어 녹슬었거나, 아니면 누군가 이미 싹 쓸어갔을 폐기물뿐이었다. ‘고밀도’라는 말에 그의 심장이 희미하게나마 고동치기 시작했다.

“분석 불가. 하지만 인공적인 구조물일 가능성 높음. 지하 층에 매몰된 것으로 추정.”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지하 층이라니. 늘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물러설 여유는 없었다. 에너지 셀이 7퍼센트. 이 수치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가자, 카이.”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삭막한 콘크리트 잔해와 뒤엉킨 철근 위를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발밑에서 부서진 파편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북서쪽으로 향할수록 먼지는 더욱 짙어졌고, 건물들의 잔해는 더 거대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한때 이 도시의 중심이었을 곳일지도 몰랐다.

카이가 안내한 곳은 반쯤 무너진 고층 빌딩의 지하 주차장 입구였다. 입구는 거대한 콘크리트 슬래브에 막혀 있었고, 그 틈새로 겨우 사람이 드나들 만한 공간이 보였다.

“여기?”

“네. 신호는 이 안에서 가장 강하게 잡힙니다.”

지훈은 헬멧 라이트를 켜고 좁은 틈새로 몸을 구겨 넣었다. 안은 지독한 곰팡이 냄새와 흙먼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의 라이트가 어둠을 가르고 벽에 달라붙은 거미줄과 이름 모를 균사체들을 비췄다. 바닥은 축축했고, 천장에서는 불규칙하게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가 앞장서서 날아갔다. 길고 굽이진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을까, 갑자기 카이의 기계음이 날카롭게 변했다.

“지훈! 움직이는 물체 감지! 크기 중형! 속도 빠름!”

동시에 지훈의 시야에 비상등처럼 붉은 경고등이 깜빡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고 벽 뒤로 숨었다. 쿵, 쿵, 쿵. 멀리서부터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짐승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 기계음이 섞인 울음소리.

‘망할, 거미형 기계 잔해들인가?’

이 폐허에는 과거 전쟁에서 파괴된 전투 드론이나 로봇 잔해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재가동되어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무작위로 생존자들을 공격하거나, 단순히 지나가는 존재들을 파괴하며 돌아다녔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지훈은 라이트를 끄고 숨을 죽였다. 헬멧 너머로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주머니 속의 낡은 블래스터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탄창에 남은 에너지 셀은 단 5발.

거대한 그림자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났다. 그건 다리가 여섯 개 달린 기계 잔해였다. 본래의 형체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재조립된 모습이었다. 한쪽 눈에서는 붉은 광선이 번쩍였고, 다른 쪽은 깨진 채로 덜렁거렸다. 몸체에서는 녹슨 금속판들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날카로운 발톱이 바닥을 긁으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젠장, 왜 하필 이런 게 여기 있는 거야?’

지훈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거대 잔해와 마주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지하 깊숙한 곳, 혹은 과거 연구 시설 같은 곳에나 숨어 있었다.

기계 잔해가 코앞을 지나쳐갔다. 지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잔해의 뒤를 쫓았다. 녀석은 어딘가에 이끌린 듯, 그들이 오던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카이가 감지한 ‘고밀도 금속’ 신호가 녀석을 끌어당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따라가자. 저 녀석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

지훈은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블래스터를 다시 집어넣고, 발소리를 죽인 채 기계 잔해의 뒤를 쫓았다. 카이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헬멧 안에서 카이의 작은 팬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기계 잔해는 한참을 더 나아갔다. 이 지하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폐쇄된 통로, 무너진 계단, 침수된 구간을 지나자 마침내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철문은 오랜 세월 속에 녹슬고 뒤틀려 있었지만, 그 육중한 존재감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기계 잔해는 그 철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 거대한 몸체를 비틀었다. 녀석의 붉은 눈에서 레이저 빔이 발사되었고, 철문의 특정 부분을 지지직거리며 녹이기 시작했다.

“저 녀석, 문을 열려고 해.”

지훈은 속삭였다. 저 안에 카이가 감지한 ‘고밀도 금속’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어쩌면 단순한 금속이 아닐지도 모른다. 과거의 유물이거나, 귀중한 에너지원일 수도 있었다.

철문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금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 가스가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녀석은 그 환경에 아랑곳 않고 꾸준히 문을 녹여냈다. 마침내 문 한가운데에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한 구멍이 생겼다.

기계 잔해가 그 구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지훈은 재빨리 블래스터를 꺼내 들었다.

“카이, 저 녀석 움직임 봉쇄!”

“알겠습니다!”

카이가 쏜살같이 날아가 기계 잔해의 관절 부위에 작은 전자 충격기를 박아 넣었다. 찌릿! 짧은 스파크와 함께 녀석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 찰나의 순간, 지훈은 방아쇠를 당겼다. 퍽! 블래스터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에너지 볼트가 녀석의 붉은 눈을 정확히 강타했다.

쿠웅!

거대한 몸체가 굉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여기저기서 스파크가 튀었고, 녀석의 몸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훈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두 발을 더 쏘았다. 녀석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에너지 셀 잔량이 2발 남았다.

“젠장, 정말 간신히 처리했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잔해를 응시했다. 위험했지만, 해냈다.

지훈은 곧바로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헬멧 라이트가 비춘 곳은 거대한 지하 저장고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 그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크고 둥근 장치. 주변에는 수많은 에너지 셀이 마치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일반적인 에너지 셀보다 훨씬 크고, 표면에서 푸른 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전부 에너지 셀이라고?”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었다. 그것도 ‘고효율’ 에너지 셀이었다. 일반 셀의 수십 배에 달하는 용량을 가졌다. 이 정도면 몇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었다. 보급 기지로 돌아가 다시 채워 넣을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다른 생존자들에게 팔 수도 있었다. 그는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폐허 속에서 부자라니,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에너지 셀을 한 손에 들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묵직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희망의 무게였다.

“카이, 스캔해봐. 뭔가 다른 건 없어?”

“스캔 중… 이상 없음. 모두 순수한 고효율 에너지 셀입니다. 단, 중앙의 장치는 용도를 알 수 없습니다. 연결 부위가 봉쇄되어 있습니다.”

중앙의 장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대한 원통형이었는데,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푸른 빛이 일정한 주기로 깜빡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가느다란 파이프 같은 것이 주변의 에너지 셀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훈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완벽했다. 기계 잔해가 지키고 있었던 것도, 고효율 에너지 셀이 이렇게나 많이 쌓여 있는 것도. 마치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함정 같았다.

그때, 지훈의 헬멧 안에서 카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훈! 비상! 외부 감지기, 거대한 진동 감지! 이 시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쿵! 쿵!

동시에 지하 저장고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콘크리트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훈은 휘청거렸다.

“뭐라고?! 왜 갑자기?”

“불명! 하지만 진동의 원인이 지하 깊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아마도 이 장치와 연관된 것 같습니다!”

지훈은 중앙의 장치를 돌아보았다. 푸른 빛이 더욱 빠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 박동처럼.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 장치 주변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들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글자들이 있었다.

‘최후의 방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를 섬뜩함이 지훈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저장고의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크랙이 순식간에 천장까지 이어졌다.

“젠장! 지금 이 에너지 셀들을 다 가져갈 수는 없어!”

지훈은 절규했다. 이 많은 셀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찢는 듯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가장 가까이 있는 고효율 셀 두 개를 집어 들고 품에 안았다. 그리고 카이에게 소리쳤다.

“카이! 탈출 경로 찾아! 가장 빠른 길로!”

“네! 가장 가까운 출구는… 이 위층 주차장입니다! 서쪽 통로를 이용해야 합니다!”

지훈은 급히 몸을 돌려왔던 길을 되짚어 달리기 시작했다. 땅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거대한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카이가 앞서 날아가 길을 안내했다. 그의 헬멧 스크린에는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구조물들의 예측 경로가 표시되었다.

“오른쪽! 지훈! 오른쪽!”

지훈은 카이의 지시에 따라 필사적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고, 먼지와 돌무더기가 그들의 뒤를 덮쳤다.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움직였다. 품에 안은 고효율 에너지 셀이 그의 몸에 부딪히며 희미한 열기를 전했다. 이것이 그의 삶이었다. 한 조각의 희망을 움켜쥐고, 무너지는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것.

마침내,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로 지훈은 주차장 입구의 틈새로 다시 기어 나왔다. 뒤이어 카이가 빠져나왔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회색 먼지로 가득했지만, 적어도 지하처럼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품에 안은 에너지 셀은 여전히 그의 손에 꽉 쥐어져 있었다. 무사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돌아왔다.

“지훈. 에너지 셀 잔량, 3퍼센트. 산소 필터 수명, 30분.”

카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감각했다. 하지만 그 말은 지훈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품에 안은 셀을 바라보았다. 푸른 빛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3퍼센트면… 이걸 쓸 수 있겠군.”

지훈은 하나의 고효율 셀을 그의 낡은 배터리 슬롯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그의 모든 장비에 생기가 돌았다. 헬멧의 경고등이 사라지고, 산소 필터가 힘찬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헬멧에는 다시 선명한 지도가 나타났다.

“이제 살았어.”

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폐허 속에서, 그는 또 하루를 살아냈다. 아니, 어쩌면 이 셀 덕분에 훨씬 더 많은 날들을 살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훈은 다시 일어섰다. 몸은 여전히 지쳐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아까와는 달랐다. 희망과 함께, 이 잔혹한 세계에 대한 익숙한 투지가 다시 타올랐다.

“카이. 이제 돌아가자. 그리고 내일은… 저 폐허의 다른 곳을 찾아야겠어.”

그는 품속의 남은 고효율 셀을 단단히 쥐었다. 이 작은 빛들이 그를 살아가게 할 것이었다. 이 재의 도시에서, 그는 또 다른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숨 쉬는 한, 걷는 한, 그는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잿빛 고요 속에서도, 그의 생존기는 계속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