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 (隙裂)
지연은 익숙한 동작으로 문을 잠그고 낡은 구두를 벗어 신발장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13층, 1307호. 그녀가 작년부터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평범했고,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이웃도 없는, 그저 조용하고 익명적인 삶을 위한 완벽한 공간.
“오늘도 수고했다, 지연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인스턴트 커피 한 잔으로 하루의 찌꺼기를 씻어내는 것이 그녀의 밤 의식이었다.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붓자 향긋한 커피 내음이 금세 좁은 주방을 채웠다. 베란다 창밖으로는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도시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풍경, 언제나처럼 똑같은 일상. 완벽한 고요였다.
그 고요를 깨트린 건, 아주 작은 소리였다.
‘딸깍.’
지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커피를 휘젓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거실 쪽에서 난 소리 같았다. 뭐지? 낡은 건물이라 어디선가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라도 났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식탁에 놓여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평소처럼 뉴스를 틀려는데, 리모컨이 조금 이상했다.
분명 어제저녁엔 식탁 가장자리에 두었는데, 지금은 식탁 중앙으로 아주 미세하게 움직여져 있는 듯했다. 지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아니면 고양이를 키우는 옆집에서 새끼 고양이라도 기르는 걸까? 쿵쿵거리는 소리는 아니었으니. 하지만 옆집은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고, 고양이는 털 알레르기 때문에 키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하… 피곤하긴 피곤한가 보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신경이 곤두선 탓일까, 귓가에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속삭임이 맴도는 것 같았다. 바람 소리인가, 아니면 이명인가. 어느 쪽이든 불쾌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지연은 다시 한번 이상한 일을 겪었다. 화장대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립스틱이 사라진 것이다. 평소 쓰던 립스틱이라 매일 아침 꺼내 쓰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립스틱은 엉뚱하게도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다. 누가 가져다 놓기라도 한 듯, 똑바로 세워진 채로.
“내가 아무리 건망증이 심해도 이건 아니지.”
지연은 찜찜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출근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아파트에서는 기묘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아둔 안경이 다음 날 아침이면 냉장고 문에 붙어있거나, 멀쩡하던 전등이 툭 하고 꺼졌다가 다시 켜지기를 반복했다. 때로는 아무도 없는 밤중에 거실에서 무언가 끌리는 듯한 소리, 혹은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낡은 건물의 해프닝이려니 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보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오래된 아파트에서 나는 소리’ 같은 검색어를 입력하며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답은 없었다. 그녀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단순한 노후화 현상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어느 날 밤, 지연은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정적 속에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낡은 탁상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때, 거실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지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누가 들어온 건가? 도둑인가? 그녀는 숨을 죽인 채 침대에서 내려왔다. 문이 잠겨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거실로 향하려는데, 복도 끝에 놓인 전신 거울에서 그녀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상했다. 복도에는 불이 꺼져 있었고,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으로는 그림자가 저렇게 선명하게 보일 리 없었다. 게다가 그림자가 흔들리는 방식이… 마치 제멋대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팔다리가 기괴하게 늘어났다 줄어들고, 머리 부분이 찌그러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연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분명 그녀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아니, 그녀의 그림자였지만, 동시에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가 그녀의 그림자를 빌려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다 침대 모서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때, 거울 속 그림자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림자의 얼굴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섬뜩한 확신이 들었다. 마치 그림자 안에 갇힌 생명체가 그녀에게 말을 걸려는 듯, 입술 부분이 움찔거렸다.
‘쉿.’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연은 들었다. 뇌리에 직접적으로 박히는, 차갑고 끈적한 속삭임을. 그리고 다음 순간, 거울 속 그림자가 빠르게 일그러지더니, 거울 표면을 따라 길고 끔찍한 균열이 생겨났다.
콰앙!
균열이 시작된 거울의 한 지점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안개는 빠르게 거울 전체를 집어삼키더니, 지연을 향해 뻗어 나왔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그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형체가 없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지연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발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뇌는 공포로 마비되었지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 공간은 더 이상 그녀의 아파트가 아니라는 것을.
어둠 속에서, 차가운 속삭임이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또렷하게, 그녀의 고막을 찢을 듯한 불협화음으로.
‘너는… 보았다.’
아파트의 벽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살아있는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