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노을이 거대한 경기장 ‘천무궁’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수십만 관중의 숨소리마저 집어삼킬 듯 웅장한 침묵이 아레나를 압도했다. 결승을 앞둔 준결승전, 두 명의 그림자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류한… 그 이름, 고작 몇 달 전만 해도 무림에 존재하지 않던 이방인의 이름이 아닌가.”
북해빙궁의 차기 궁주, 백염화는 붉은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새하얀 도포자락은 싸늘한 빙기(氷氣)를 머금고 희미하게 펄럭였다. 무림에 떠도는 소문처럼, 류한은 정말 어디서 굴러온 돌멩이 같은 존재였다. 정파도 사파도 아닌, 그 어떤 문파의 계보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홀연히 나타나 천무궁의 문을 부수고 올라온 괴물.
“이방인이라… 재미있는 표현이군.”
류한은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은 느슨하게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마치 길거리를 걷는 청년처럼 편안한 자세였다. 하지만 그 편안함이야말로 백염화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만함인가, 아니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인가.
“천하의 운명을 걸고 겨루는 자리다. 장난질은 여기까지다.”
백염화의 눈에서 싸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전신을 감싸던 빙기가 아레나 바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쩌적, 쩌적. 대리석 바닥에 서리가 피어오르며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관중석 여기저기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북해빙궁의 궁주는 다르다는 듯, 기대감에 찬 술렁임이었다.
류한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강렬한 존재감이 없는 듯하면서도,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심연처럼 느껴졌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지루함과 함께 알 수 없는 흥미가 옅게 서려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심판의 선언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염화가 움직였다. 그녀의 발자국이 닿는 곳마다 바닥이 얼어붙었다. 얼음 폭풍이 류한을 향해 휘몰아쳤다. ‘빙환열풍검(氷幻烈風劍)!’. 북해빙궁의 절세검법 중 하나였다. 검기는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그 속에 숨겨진 진짜 검날은 번개처럼 류한의 목덜미를 노렸다.
수많은 고수가 이 검기에 속아 넘어갔다. 보이는 것은 환영, 진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냉기였다. 하지만 류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푸쉬이이익!
얼음 파편들이 류한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잔상…?’
백염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잔상이라기엔 너무나도 선명했다. 마치 류한의 육체가 그대로 기화해버린 것 같았다. 그녀의 등골에 섬뜩한 한기가 스쳤다.
“꽤나 성급하군.”
류한의 목소리가 백염화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언제?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었던 그가, 일합만에 자신의 검풍을 뚫고 등 뒤로 이동한 것인가?
백염화는 본능적으로 몸을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빙설화룡(氷雪華龍)!’. 검끝에서 푸른색의 용머리가 솟아올라 류한을 향해 포효했다. 냉기가 응축된 그 용은 닿는 모든 것을 얼려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류한은 다시 한번 사라졌다. 이번에는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잔상은 푸른 용머리에 닿자마자 산산조각 났다.
콰아앙!
용머리가 벽에 부딪히며 거대한 얼음 폭발을 일으켰다. 관중석의 일부가 얼어붙어 하얗게 변했다. 그 충격에 천무궁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놀랍군.”
이번에는 류한이 공중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는 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착지한 그의 발밑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북해빙궁의 절기가 이 정도라니. 기대 이하다.”
백염화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평생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모욕이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건방진 놈! 내 너를 얼려 죽여버리겠다!”
그녀의 전신에서 푸른 냉기가 거대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얼음 바늘처럼 뾰족하게 섰고, 그녀의 두 눈은 마치 빙하처럼 새파랗게 빛났다. 그 냉기만으로도 아레나의 모든 생물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무림 최고수의 진정한 힘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빙궁주(氷宮主)의 진정한 경지… 얼음을 넘어선 설한(雪寒)의 힘!’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저 정도의 힘이라면, 그 어떤 고수도 버텨내지 못할 터였다. 류한이라는 이방인조차도.
류한은 그 거대한 냉기 속에서도 태연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지루함과 함께 미묘한 호기심만이 감돌았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나를 건드릴 수 없어.”
그 말과 함께, 류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달라졌다. 냉기도, 열기도 아닌, 그 어떤 기운도 아니었다. 단지…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어떤 것도 닿지 않는 무(無)의 공간.
백염화는 순간 자신의 빙기가 류한의 주변에서 휘발되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류한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이 생겨난 것이다.
“이… 이런 황당한 기공은 대체…!”
그녀는 당황했다. 북해빙궁의 비급에도, 무림 전체에 알려진 어떤 무공에도 이런 경지는 없었다. 육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힘.
“무(無)는 모든 것을 감싸 안지만,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지.”
류한의 목소리가 마치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점차 커지더니, 마치 공간 자체가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진(共振)…? 아니, 저것은…’
백염화는 본능적으로 경계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오고 있다는 직감이었다.
류한의 오른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주먹을 쥐지도, 손날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손바닥을 펼친 채, 마치 허공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천무궁 전체의 대기가 뒤틀리는 듯한 기이한 압력이 실려 있었다.
“이건 내가 살던 세상에서 ‘양자(量子)’라 불리던 것들의 춤이다.”
류한의 눈빛이 순간 섬광처럼 빛났다. 그의 손끝에서 무형의 파동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빛도 소리도 아니었지만, 백염화의 오감을 마비시키는 듯한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였다.
백염화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모든 빙기를 끌어모아 방어막을 형성했다. ‘빙극현무진(氷極玄武陣)!’ 북해빙궁의 최강 방어 진법이었다. 푸른빛의 거대한 현무 거북이 등껍질이 류한의 파동을 막아섰다.
하지만 류한의 파동은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을 흔드는 떨림이었다.
파동이 현무 거북이 등껍질에 닿는 순간, 쩌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빙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단순한 균열이 아니었다. 현무를 이루는 얼음 분자 하나하나가 미세하게 떨리면서 그 결속력을 잃어가는 듯했다.
“크아악!”
백염화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육체를 감싸는 빙기가 무너져 내리자, 역으로 그 진동이 그녀의 오장육부를 뒤흔들었다. 피를 토하며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빙기는 힘없이 흩어져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
류한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결과라도 되는 듯.
“패배를 인정한다.”
백염화는 쓰러진 채 간신히 말했다. 그녀의 새하얀 도포는 찢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선혈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여전히 류한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분노보다는 경외심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대체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류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무궁의 거대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노을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어둠이 서서히 지배해오고 있었다.
“다음은 결승이군.”
그의 시선은 관중석 너머, 천무궁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황제의 좌석을 향했다. 그곳에는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마지막 상대가, 침묵 속에서 류한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대회의 진정한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