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이제 막 불타오르기 시작한 제국의 심장부에서 펼쳐지는 가장 위험하고도 어이없는 로맨틱 코미디의 최신 화를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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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젬마리스의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할 무렵, 수도의 가장 후미진 골목 어귀에 숨겨진 ‘밤이슬 동맹’의 비밀 아지트는 여느 때보다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습한 곰팡이 냄새와 낡은 나무가 타는 연기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동맹의 핵심 인물들이 지도 한 장을 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흑장미 세금 장부’다.”
장군님의 굵고 나직한 목소리가 탁한 공기를 갈랐다. 탁자에 펼쳐진 수도의 지도는 황실 기록보관소 근처에 붉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장군님은 거친 손가락으로 그곳을 툭툭 쳤다.
“켈시 백작이 지난 5년간 평민들에게 갈취한 불법 세금 내역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게 있으면 켈시 백작은 물론, 그를 비호하는 황실 인사들까지 전부 끌어내릴 수 있어. 우리 ‘밤이슬 동맹’의 명분을 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다.”
모두의 눈빛에 비장함이 스쳤지만, 리안의 눈빛만은 달랐다. 그녀는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며 하품을 꾹 참았다.
“장군님, 명분도 좋고 다 좋은데요. 그 장부가 어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똥 묻은 문서 같은 게 아닐 텐데, 그걸 누가 가져온답니까?”
툭 던지는 리안의 질문에 장군님은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언제나 리안에게 불길한 예감이었다.
“바로 너다, 리안.”
“네? 저요? 장군님, 제 특기는 칼 빼 들고 멱살 잡는 거지, 도서관 귀신처럼 책 뒤지는 게 아닙니다만.”
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장군님은 요지부동이었다.
“네가 가장 눈에 띄지 않고, 가장 기민하고, 가장 임기응변에 강하다. 그리고… 가장 뻔뻔하지. 딱이다.”
“제가 언제요! 어이없어라… 뻔뻔한 건 장군님이시죠, 맨날 저한테 제일 위험한 일만 시키시고!”
리안이 발끈했지만, 장군님은 이미 다음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기록보관소는 낮에는 황실 서기관들이 드나들고 밤에는 경비병들이 순찰한다. 하지만 켈시 백작 본인도 이 장부의 존재를 은밀히 숨기고 싶어 하기에, 이례적으로 심야 시간대에 소수의 인원만 출입이 허용되는 특별 보관실에 넣어뒀다고 한다. 경비도 허술할 거야.”
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허술한 경비라니, 보통 이런 말은 ‘함정’이라는 소리와 동의어였다.
“위험하긴 하지만, 꼭 해내야만 한다. 네가 해내면, 젬마리스의 모든 평민이 너를 영웅으로 기억할 것이다.”
장군님의 진지한 표정에 리안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침투 경로와 탈출 계획이 빠르게 그려지고 있었다. 영웅? 아니, 그보다는 그냥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제국을 뒤엎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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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젬마리스 수도의 웅장한 대로는 잠들어 있었지만, 리안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익숙하게 지붕을 타고 넘고, 좁은 골목을 가로질러 황실 기록보관소 뒤편에 다다랐다. 웅장한 아치형 문과 높다란 벽, 그리고 미로 같은 복도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도서관 주제에 왜 이렇게 거창해.”
툴툴거리며 벽을 기어 오르던 리안은 간신히 2층 창문 하나를 열고 안으로 잠입했다. 먼지 냄새와 낡은 종이 냄새가 확 끼쳐왔다. 희미한 달빛이 높은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복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동시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젬마리스 제국 초기 재정 보고서’와 ‘황실 수렵 일지’는 같은 시기에 작성되었으나, 종이 질과 잉크의 색상이 현저히 다르군. 흥미로워라.”
리안은 화들짝 놀라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젠장, 경비병이 벌써 순찰을 도는 건가? 아니면… 켈시 백작이 장부를 미리 빼돌리는 건가?’
몸을 바싹 웅크린 채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니, 경비병의 묵직한 갑옷 대신 낡은 서기관복을 입은 사내가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고문서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안경 너머로 지독한 근시임이 분명해 보이는 눈은 종이 한 장에 완전히 홀려 있었다. 그는 손에 든 붓으로 연신 노트를 끄적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기록의 오류가 아니다. 의도적인 조작… 마치 누군가 과거를 은폐하려는 듯한데… 대단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리안은 어이가 없었다. 한밤중에 기록보관소에서 고문서나 파고 있는 괴짜라니. 게다가 저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경비병에게는 다 들릴 텐데!
‘들키면 안 돼. 일단 조용히 지나가자.’
최대한 소리 내지 않으려 발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지나가려는데, 하필 그 순간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이 지점이다! 377년, 재상 알베르트의…”
“어잇!”
사내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리안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발끝이 낡은 목재 바닥에 삐끗하며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사내가 고개를 획 돌렸다. 흐릿한 시야에도 불구하고 리안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사내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촛불을 든 손을 덜덜 떨었다. 촛불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리안의 모습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리안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아, 깜짝이야! 저, 저요? 저는… 새벽까지 일하는 서기관 조수인데요! 휴, 간밤에 너무 졸려서 잠깐 복도에서 바람 좀 쐴까 했더니, 세상에, 여기서 뭐 하세요? 야근하는 분이 또 계실 줄은 몰랐네요!”
리안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밝고 명랑하게 말했다. 이 기록보관소는 신입 서기관이 너무 많아 서로 얼굴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는 정보를 떠올린 것이다. 게다가 이 사내는 근시가 심하니 더욱 속이기 쉬울 터였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리안을 쳐다봤다. 리안은 순간 심장이 쫄깃했지만, 태연한 척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서기관 조수…?”
“네! 켈시 백작님께서 갑자기 찾으시는 문서가 있어서요. 이거 뭐, 야근도 이런 야근이 없죠. 아, 그런데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 여기서 일한 지 얼마 안 돼서요.”
리안은 능청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말에 사내의 경계심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아… 저는 카인입니다. 카인 마리스. 이곳의… 임시 서기관입니다. 당신은…?”
카인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어딘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리안은 그를 찬찬히 훑어봤다. 낡았지만 깨끗한 서기관복, 너저분한 머리카락, 그리고 안경 너머의 선한 눈동자.
‘임시 서기관? 그럼 더 잘 됐네. 신입이라 얼굴도 잘 모를 거고.’
“저는 리안입니다! 반가워요, 카인님! 에휴, 이렇게 새벽까지 고생하시는데, 제가 뭘 좀 도와드릴까요? 저야 뭐 워낙 잡다한 일을 많이 해서요.”
리안은 자연스럽게 카인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이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그녀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범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어딘가 어리숙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학자 타입이었다.
카인은 리안의 갑작스러운 친근함에 당황한 듯 보였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연구 중이라서요. 그보다 리안님, 켈시 백작님께서 찾으시는 문서가… 무엇이기에 새벽까지 일하시는 건가요?”
‘젠장, 뭘 물어봐도 하필 켈시 백작이야.’
리안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그거요! 글쎄, 제가 담당하는 곳도 아닌데, 켈시 백작님께서 ‘흑장미 세금’ 관련 장부를 급히 찾아오라고 하셨다니까요! 당장 내일 아침까지 보고해야 한다면서요. 황실에 제출해야 할 서류와 함께 말이죠!”
리안은 ‘흑장미 세금 장부’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카인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흑장미… 세금 장부요?”
카인의 목소리에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리안은 직감했다. 이 남자, 뭔가 아는 게 있었다.
“네! 너무 황당하죠? 제가 보기에 백작님께서 중요한 서류를 어디다 두시고 찾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괜히 아랫사람만 들들 볶는 거 있죠? 흐음… 혹시 카인님, 그 장부가 어디쯤 있는지 아세요? 저는 도통 찾아도 안 보여서요. 어디 특별 보관실에라도 넣어두셨나…”
리안은 슬쩍 흘리듯 ‘특별 보관실’이라는 단어를 덧붙였다. 카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촛불이 더 크게 흔들렸다.
“그… 그건… 리안님, 혹시 제가 그 장부를 찾는 것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카인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는 망설임과 함께 어딘가 모를 결심이 서려 있었다. 리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예상치 못한 조력자를 얻은 셈이었다. 그것도 이 기록보관소의 비밀을 아는 듯한 조력자를.
“어머, 정말요? 카인님도 켈시 백작님께 시달리시는군요! 좋아요, 같이 찾아봐요! 혼자 찾는 것보다 훨씬 빠르겠죠?”
리안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카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카인은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사실은… 켈시 백작님께 개인적으로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 장부를 찾아보던 참이었습니다.”
카인은 웅얼거렸다. 리안은 그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속으로 비웃었다. ‘개인적으로 물어볼 것이요? 어디까지 순진할까.’
“그럼 어디로 가면 될까요? 특별 보관실은 어디에 있어요?”
리안이 재촉하자, 카인은 주위를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죠.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그곳은…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카인은 촛불을 높이 들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리안은 뒤를 따르며 씨익 웃었다. 꽤나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순진한 학자’라고 판단한 남자의 머릿속은 자신보다 훨씬 복잡하고 위험한 계산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복잡한 복도를 지나, 낡은 철문 앞에 섰을 때였다.
“저, 저기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리안과 카인은 동시에 몸을 굳혔다. 둘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경비병이잖아!’
리안의 손이 허리춤의 단검으로 향하려는 찰나, 카인이 본능적으로 리안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리고는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누, 누구십니까? 여, 여기는 출입 금지 구역인데…”
멀리서 다가오는 경비병의 횃불 불빛이 둘의 얼굴을 비췄다. 경비병의 눈빛은 의심으로 가득했다.
“카인 임시 서기관님,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옆의 분은…?”
리안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망할! 저 근시 안경쟁이가 날 더 위험하게 만들잖아!’
하지만 카인은 의외의 행동을 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경비병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분은… 제… 제 여자친구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리안은 얼어붙었다. 경비병은 물론, 카인 본인도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네?!”
리안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기록보관소의 높은 천장에 울려 퍼졌다.
“자, 잠깐만요, 카인님?! 무슨 소리예요! 제가 왜 카인님 여자친구입니까!”
“쉬잇! 조용히 하세요! 들키면… 둘 다 큰일 난다고요!”
카인이 다급하게 속삭이며 리안의 입을 막았다. 그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사뭇 진지했다. 경비병은 어이없다는 듯 둘을 번갈아 봤다.
리안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이 남자,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하지만 어색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깨달았다. 이 순간만큼은, 이 ‘여자친구’라는 어이없는 역할극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
과연 리안은 카인의 황당한 연극에 맞춰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그리고 켈시 백작의 ‘흑장미 세금 장부’는 어디에 숨겨져 있는 걸까? 이들의 긴장감 넘치는 로맨틱 코미디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