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울었다. 아니, 정확히는 거대한 경기장의 돔형 천장에 설치된 불가사의한 장치들이 기이한 공명을 일으켜 대기를 진동시킨 소리였다. 금속과 알 수 없는 재료가 뒤섞여 만들어진 돔은 평소에는 푸른 하늘을 비추었지만, 오늘은 핏빛 노을과 짙은 보랏빛이 뒤섞인 환영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아래, 수만 개의 눈동자가 아레나를 향해 일제히 꽂혀 있었다.
“다음 대국, 서부 무림 십대 문파 중 하나, 청운검문(靑雲劍門)의 적자, 이한(李瀚)!”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함성이 폭풍처럼 일었다. 이한은 고요하게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등 뒤로 휘날리는 청색 도포 자락이 그를 더욱 꼿꼿하게 보이게 했다. 허리춤에 찬 보검 ‘청운(靑雲)’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의 시선은 이미 맞은편에 서 있는 상대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상대는… 북해(北海) 심연의 권사(深淵의 拳士), 묵우(墨雨)!”
함성은 방금 전보다 훨씬 적었다. 아니, 함성이라기보다는 술렁임에 가까웠다. 묵우는 기괴한 형상의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깊게 파인 후드에 가려져 그림자가 져 있었고, 그의 손은 일반적인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길고 마디가 굵었다. 그의 발걸음은 흙먼지를 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그가 서 있는 대지조차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했다.
이한은 묵우의 기척에서 익숙한 무인의 강렬함이 아닌, 저릿하고 불쾌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늪 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검은 기름 같았고, 심장이 아닌 뇌수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불협화음 같았다.
“드디어… 그쪽 일족의 권사인가.”
이한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묵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시선만이 이한을 꿰뚫고 있었다.
“천하제일 무도회… 그저 단순한 무림의 대회가 아니었다는 건 진작에 눈치챘네만.”
이한은 손잡이를 잡았다. 청운검이 칼집에서 미끄러져 나오며 맑은 쇳소리를 냈다. 검날에 비친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하지만 우리 강호인들은 그 어떤 재앙 앞에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하물며 천하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묵우의 후드 아래에서 희미한 비웃음 같은 것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아니, 웃음소리라기엔 너무나도 건조하고, 사람의 성대에서 나올 수 없는 기계적인 마찰음 같은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한의 귀를 긁고 지나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불쾌감을 선사했다.
“시작!”
심판의 외침이 떨어지자마자, 묵우는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빨랐던 것이다. 이한의 눈에는 마치 그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입자가 동시에 다른 위치로 이동한 것처럼 보였다. 눈앞에 있던 존재가 다음 순간에는 바로 옆, 그것도 지면에서 반 뼘 정도 떠오른 채로 서 있었다.
콰앙!
묵우의 주먹이 이한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대리석 바닥이 움푹 파이며 금이 갔다. 놀라운 것은 주먹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 충격파가 마치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듯한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는 점이었다. 시야가 잠시 일렁였다.
‘이건… 단순한 속도가 아니야.’
이한은 재빨리 청운검을 휘둘러 반격했다. 청운검은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푸른 궤적을 그리며 묵우의 옆구리를 노렸다. 하지만 묵우는 다시 한번 사라졌다. 이번에는 그 움직임이 더욱 기묘했다. 마치 그의 몸이 흐물흐물한 연기처럼 퍼졌다가, 다시 단단한 형태로 응축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파아아앙!
묵우의 발이 이한의 검날을 스치듯 걷어찼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거대한 고무줄이 튕겨 나가는 듯한 둔탁한 소리였다. 이한의 손목이 저릿했다. 검날이 휘어지는 동시에, 묵우의 팔이 마치 문어 촉수처럼 길게 늘어나더니 이한의 안면을 향해 쇄도했다.
피슉!
이한은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묵우의 손가락 끝이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이한은 오싹한 감각을 느꼈다.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그의 살을 긁고 지나가자, 마치 차가운 심연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뺨에 닿은 곳은 긁힌 상처조차 없었지만, 그 부위의 피부는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무엇이지? 저것은… 무공이 아니야. 인류의 영역 밖의 무언가…!’
이한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청운검문 검법은 수많은 강적들과 싸워 이겨 온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묵우의 움직임은 그 어떤 검법으로도 예측 불가능했다. 너무나도… 유연하고, 너무나도 비틀려 있었다.
이한은 온몸의 기운을 끌어 모아 검에 집중했다.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청색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청운검결(靑雲劍訣) 제삼식, 쾌검무형(快劍無形)!”
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눈에 보이는 궤적 같은 건 없었다. 오직 잔영만이 뒤따랐다. 수십, 수백 개의 검날이 동시에 묵우를 향해 쏟아지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이한은 속도와 정교함으로 묵우의 기이한 움직임을 봉쇄하려 했다.
쉬이이잉- 팟! 팟! 팟!
날카로운 검풍이 묵우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묵우의 검은 도포 자락이 찢겨 나갔고, 그의 피부가 잠시 드러났다. 하지만 이한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찢겨진 옷 아래 드러난 묵우의 팔뚝은 창백한 회색빛이었고, 피부 위에는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섬뜩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문신이 아니었다. 마치 피부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진 듯했다. 그 무늬들은 이한의 시선이 닿는 순간,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크윽…!”
이한의 시야가 또다시 일렁였다. 무늬를 너무 오래 응시한 탓인지, 눈앞의 공간이 뒤틀리고, 멀리 떨어진 관중석의 얼굴들이 길게 늘어나거나 뭉개지는 듯한 환각이 스쳐 지나갔다.
‘안 돼! 시선을 빼앗기지 마라!’
이한은 정신을 차리고 검격을 이어나갔다. 그의 검은 묵우의 기괴한 방어를 뚫고 마침내 묵우의 어깨를 베었다.
촤아악!
검날이 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피는 솟구치지 않았다. 대신, 묵우의 어깨에서 검고 끈적한 액체가 스며 나왔다. 그 액체는 마치 기름처럼 번들거렸고, 섬뜩하게도 공기 중에서 희미하게 증발하며 역겨운 비린내를 풍겼다. 이한은 검을 빼내려 했지만, 묵우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수축하며 검날을 꽉 붙잡았다.
묵우의 후드 아래에서 또다시 그 기계적인 마찰음이 울렸다. 마치 조롱하는 듯한 소리였다.
“인간의 무공으로는… 나를 해할 수 없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지만, 동시에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듯한 불협화음이 섞여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묵우는 잡고 있던 이한의 검날을 강하게 비틀었다.
크득!
청운검의 단단한 검날이 비정상적으로 휘어졌다. 이한은 충격에 못 이겨 검을 놓칠 뻔했다. 그 순간, 묵우의 비어있던 다른 팔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라, 그의 손가락들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강철로 만들어진 맹수의 발톱 같았다.
묵우의 손톱이 이한의 가슴팍을 향해 쇄도했다. 이한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지만,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도포를 찢고 가슴을 깊숙이 할퀴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이 몰려왔다.
“크윽!”
이한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검고 끈적한 묵우의 피와는 달리, 이한의 피는 붉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 상처 위로 묵우의 손톱에 묻어 있던 검은 액체가 묻어났다. 액체가 피부에 닿자마자, 이한은 온몸의 혈액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움을 느꼈다. 동시에 시야가 다시 한번 뒤틀리며, 눈앞의 묵우가 거대한 문어의 형상으로, 혹은 셀 수 없는 눈알이 박힌 역겨운 형상으로 변하는 환각을 보았다.
그 환각 속에서, 묵우의 후드 아래에 감춰져 있던 얼굴이 살짝 드러나는 듯했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수많은 갈라진 틈새와, 겹겹이 포개진 피부, 그리고 그 틈새마다 희미하게 빛나는 미지의 기관들이 박혀 있는, 형언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다.
‘이건… 이건…!’
이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존재 그 자체를 부정당하는 듯한, 자신이 지금껏 믿어왔던 모든 세계의 질서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대적인 절망감이었다.
묵우는 천천히 이한에게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지면을 울리는 대신, 이한의 뇌수 속에서 알 수 없는 주파수의 진동을 일으켰다. 경기장 위 돔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던 핏빛 노을과 보랏빛 환영이 더욱 짙어지며, 마치 심연의 촉수처럼 이한의 정신을 감싸는 듯했다.
“알겠나? 인간의 힘으론… 이 재앙을 막을 수 없다. 너희의 모든 노력은… 그저 무의미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묵우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개의 차가운 목소리들이 동시에 이한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어떤 목소리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같았고, 어떤 목소리는 거대한 산이 무너지는 소리 같았다. 이한은 귀를 막으려 했지만, 그 소리는 외부가 아닌 그의 내면에서부터 울리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이한은 비틀거렸다. 무릎을 꿇을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버텼다. 가슴의 상처는 더욱 뜨거워지고 차가워지기를 반복하며 그의 정신을 교란시켰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무의미하다고… 누가 감히 단정하는가!”
이한은 이를 악물고 청운검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검날은 여전히 기괴하게 휘어져 있었지만, 그의 손아귀에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우리 무인들에게는… 포기란 없다! 설령 이 세계가 전부 뒤틀려진다 할지라도… 우리 검은 꺾이지 않는다!”
이한의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무공의 기운을 넘어선, 이한의 모든 정신과 의지가 응축된 빛이었다. 그 빛은 경기장을 감싸고 있던 핏빛 노을과 보랏빛 환영을 잠시나마 밀어내는 듯했다.
묵우는 잠시 멈칫했다. 그의 후드 아래에서, 처음으로 알 수 없는 감정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어리석군… 네놈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했나.”
묵우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길고 마디 굵은 손가락들이 불가능한 각도로 비틀리며, 마치 거대한 촉수가 하늘을 움켜쥐는 듯한 형상을 만들었다. 경기장 돔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던 핏빛 노을과 보랏빛 환영이 일제히 묵우의 손끝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이한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묵우가 지금 막 시전하려는 것은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적 공포의 한 조각을 현세로 끌어당기는 행위였다.
‘이것이… 이 대회의 진짜 목적이었나. 천하의 운명이라는 건… 고작 시작에 불과했던 건가.’
이한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검이 푸르게 빛났다. 승패를 떠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기괴한 존재의 발악을 막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외침이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와라…! 네놈이 어떤 심연의 존재를 끌어오든… 이 청운검으로 모조리 베어 버리겠다!”
이한은 청운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이 검날에 집중되며, 마치 거대한 푸른 용 한 마리가 솟아오르는 듯한 장관을 연출했다. 하늘에서 수렴하던 핏빛과 보랏빛 에너지가 묵우의 손끝에서 형체를 이루는 순간, 이한은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푸른 빛과 핏빛, 보랏빛이 뒤섞인 재앙이 경기장 한가운데서 격돌하려는 찰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