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33화

지훈은 텅 빈 사무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 위에는 식어버린 커피잔과 지난 밤을 함께 보낸 서류 뭉치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회색빛 새벽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의 눈은 피로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집념은 여전히 뜨거웠다. 은채를 찾아 헤맨 시간은 햇수로만 열다섯 해, 그의 청춘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긴 여정이었다.

며칠 전, 그는 한 어린이 재단에서 익명의 기부자 명단을 확보했다. 매달 소액이지만 꾸준히 기부를 이어온 이름 없는 후원자. 그 후원자의 주소는 흐릿한 글씨로 적혀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은채의 필체와 닮아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 어쩌면 또다시 헛된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저했지만, 그의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만은 달랐으면, 이번만은…

오후에야 겨우 도착한 작은 시골 마을은 도시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낡은 상점 간판들과,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은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게 만드는 듯했다. 지훈은 주머니 속의 주소를 다시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재단에서 일러준 주소는 마을 가장자리, 허름하지만 정갈한 모습의 보육원이었다. ‘햇살 나눔 보육원’이라는 낡은 나무 간판이 햇살 아래 바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먼저 지훈을 반겼다. 마당에서는 서너 명의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낡은 건물의 창문마다 따스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 한 분이 안에서 나오셨다. 김 여사님, 재단의 이사장이자 보육원의 원장님이었다.

“어서 오세요. 재단에서 연락받았습니다. 익명 후원 건으로 오셨다고요.”

김 여사님은 온화한 미소로 지훈을 맞아주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훈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은채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십니까? 이 사람이 여기에 후원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 여사님의 눈빛이 사진 속 은채의 얼굴에 닿는 순간, 찰나의 흔들림을 지훈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미소에서 지훈은 희망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은채… 김은채 말이지요.”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이름이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지훈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열다섯 년의 갈증이 일순간 해소되는 듯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네, 맞습니다. 은채를 아시는군요.”

김 여사님은 지훈을 작은 응접실로 안내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이고,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창밖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은채는… 여기서 한 5년 정도 일했었지요. 저 아이들 보살피면서, 그림도 가르치고… 조용하고 늘 남을 배려하는 아이였습니다. 아이들이 참 많이 따랐어요.”

지훈은 숨죽여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기억하는 은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늘 따뜻하고, 여리고도 강했던 그의 첫사랑. 하지만 5년 전이라니, 그렇다면 지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5년 전이라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김 여사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아련한 눈빛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은채는… 잠시 이 보육원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큰 수술을 받고 요양차 내려왔던 곳이었어요. 마음의 상처도 깊었지요.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고,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놓으려던 순간이었는데, 이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살 힘을 얻었지요. 특히 윤아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이였는데, 은채가 자기 병은 잊은 듯이 그 아이만 돌봤습니다.”

지훈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큰 수술? 가족을 잃는 아픔? 그가 알지 못하는 지난 세월 동안 은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자신만 몰랐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며왔다.

“그럼…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수술은… 괜찮았습니까?” 지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김 여사님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은채는… 윤아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이 보육원을 떠났습니다. 윤아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했던 곳이 있었거든요. 은채는 그 아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홀로 떠났습니다. 어딘지 말해주지 않았어요. 다만, 윤아가 선물해준 작은 노트를 쥐고 말했지요. ‘아마도… 그곳에 가면 나를 온전히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요.”

지훈의 심장이 다시금 차갑게 식는 듯했다.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은채. 그는 애써 진정하며 물었다.

“그 노트는… 윤아가 은채에게 준 선물인가요?”

“네. 윤아가 그림을 잘 그렸어요. 그 노트에 자신이 가고 싶은 곳들을 그림으로 그려 넣었었지요. 은채가 떠나기 전, 저에게 잠깐 보여주며 ‘이 노트가 저의 길잡이가 될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언젠가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이 노트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자신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은…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테니, 이 노트를 보면 길을 알게 될 거라고요.”

김 여사님은 잠시 망설이더니, 책상 서랍에서 낡은 노트를 꺼내 지훈에게 건넸다. 작고, 표지는 빛바랬지만, 그 안에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을 터였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받아들었다. 표지에는 서툰 글씨로 ‘은채 언니에게. 윤아가.’ 라고 적혀 있었다.

노트를 펼치자, 색연필로 그린 그림들이 지훈을 맞이했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진 푸른 바다, 높이 솟은 산, 그리고 밤하늘의 별.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 지훈의 눈은 한 그림에 멈췄다.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 그 나무 아래에는 작은 벤치가 놓여 있었고, 벤치에는 한 소녀와 소년이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은 지훈과 은채의 어릴 적 추억 속 한 장면과 겹쳐졌다. 그림 아래에는 서툰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나무는… 약속의 나무. 언니와 다시 만나고 싶은 곳.’

지훈은 그림 속의 장소를 보자마자 직감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와 은채가 함께 자주 가던 뒷산의 언덕이었다. 그들이 미래를 약속했던, 비밀스러운 아지트. 은채는 그곳에서 윤아와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을까, 아니면… 그를 만나고 싶어 했을까.

김 여사님은 지훈의 복잡한 표정을 읽었는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은채는 떠나면서, 자신이 꼭 다시 돌아올 거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지훈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은채는 그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아픔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며, 그리고 언젠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돌아올 것이라는 김 여사님의 말이 그의 심장을 울렸다.

낡은 노트 한 권, 그리고 아이의 서툰 그림은 새로운 희망이자 동시에 더욱 깊은 그리움이 되어 지훈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은채가 마지막으로 남긴 단서. 그녀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지훈은 노트를 가슴에 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다. 그들의 추억이 깃든 약속의 장소로. 그곳에서 은채의 흔적을 찾고, 그녀의 현재를 마주할 준비를 해야 했다. 열다섯 해의 기다림, 그 끝이 머지않았다는 예감과 함께, 지훈은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기대만큼이나 깊은 불안감이 자리 잡았다. 그녀가 그곳에 있을까? 그리고 그녀를 만났을 때, 자신은 어떤 이야기를 건넬 수 있을까. 바보 같았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그의 눈에는 다시금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