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푸른색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거대한 메카닉 ‘천랑’의 오른팔에 달린 플라즈마 캐논이 작렬하며, 전방의 아르콘 제국 소속 유기체 전투기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폭발음이 고막을 때렸지만, 류진의 신경은 이미 수백 번의 전투를 통해 단련되어 있었다. 조종석 안은 산소 혼합기 특유의 비릿한 냄새와 엔진 과열 경보음으로 가득했지만, 그의 시야는 오직 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천랑, 전방 셋! 좌현에 둘, 우현에 하나! 후퇴하지 마라, 류진! 목표는 거점 탈환이다!”
통신망을 통해 사령관의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인간 연합의 대규모 공습 작전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르콘 제국의 방어선은 견고했지만, 천랑의 진격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은빛 장갑에 새겨진 늑대 문양이 핏빛 노을 아래서 섬뜩하게 빛났다. 류진은 기체를 맹렬히 회전시키며, 자신의 뒤를 쫓던 아르콘의 전투 기체를 역습했다. 날카로운 발톱 형태의 근접 무기가 적의 동력부를 찢어발겼다. 금속과 유기체가 뒤섞인 파편들이 우주 공간으로 흩뿌려졌다.
수많은 생명이 자신의 손에 스러져 갔다. 그들은 이종족. 외계인.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존재.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류진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것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뿌리 깊은 감정의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류진의 시야에 포착된 하나의 그림자. 여느 아르콘 기체들과는 다른, 유려하면서도 기묘한 곡선을 지닌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예술 작품 같았다. 검은색 유기체 장갑 곳곳에서 보라색의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팬텀’. 아르콘 제국의 특수 정예 부대가 운용하는 최신예 기체 중 하나. 그리고 그 기체의 파일럿은…
류진의 손이 순간적으로 조종간 위에서 굳었다. 망설임은 전장에서 독약과 같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그의 뇌리 속에서, 잊고 싶었던 잔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 * *
“인간의 심장은 이렇게 뛰는구나. 신기해.”
차갑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그의 가슴팍에 얹혔을 때, 류진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어둠이 내린 숲 속, 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 빛을 반사하는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 같았다. 엘시아. 그녀는 아르콘족이었고, 류진은 인류 연합의 견습 병사였다. 서로의 종족이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이던 그 시기, 그들은 금지된 선을 넘어 만났다.
“엘시아… 이러다 들키면….”
“어차피 들킬 운명이었잖아, 류진.”
그녀의 목소리는 밤바람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체념은 류진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동시에 뜨거웠다. 그들의 종족이 다르고, 이성이 달라도,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만은 변치 않는 진실이었다.
“나는… 너를 지킬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어린 류진의 맹세는, 지금 이 순간, 피비린내 나는 전장 속에서 비웃음처럼 되살아났다.
* * *
“류진! 뭐 하는 건가! ‘팬텀’을 놓치지 마라!”
사령관의 호통이 통신망을 찢어발겼다. 전방의 ‘팬텀’은 기묘한 움직임으로 아군 기체들을 농락하며 후퇴하고 있었다. 류진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과거를 회상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무의식적으로 특정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다. 그것은 오래전 엘시아와 둘만이 공유하던, 비밀 통신 주파수. 잡음만이 가득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놀랍게도, 그 순간 그의 뇌리를 강타한 것은 단순한 잡음이 아니었다. 짧고 날카로운, 그러나 분명히 감정이 담긴 음파 신호. 언어가 아닌, 감정의 파동. **——살아남아, 류진.——** 마치 그녀의 목소리가 직접 귓가에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엘시아…!”
류진의 조종간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전장의 혼돈 속에서, 그녀의 기체가 유독 선명하게 빛났다. 분명 그녀였다. 그 ‘팬텀’ 안에 있는 것은, 자신이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그녀였다.
‘천랑’이 맹렬히 돌진했다. 플라즈마 캐논이 불을 뿜었지만, 류진은 의도적으로 조준을 빗나가게 했다. 섬광은 ‘팬텀’의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며, 뒤따르던 아르콘 전투기 한 대를 격추시켰다.
“류진! 지금 뭐 하는 건가?! 실수인가? 아니면…!”
사령관의 의심 섞인 목소리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류진은 다른 것에 집중할 겨를이 없었다. ‘팬텀’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보라색의 잔상을 남겼다. 그 잔상 속에서, 아주 잠깐, 희미한 빛으로 이루어진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원망과 슬픔,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눈빛.
**——잊지 마, 류진. 우리는…——**
그녀의 기체가 급가속하며 전장을 이탈했다. 류진은 그녀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아르콘 전투기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맹렬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천랑’의 장갑에 수많은 레이저가 작렬했다.
“젠장! 류진, 빨리 정신 차려! 전선을 재정비한다! 후퇴해!”
사령관의 다급한 외침에 류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무수히 날아드는 포화를 막아내며 후퇴 명령을 따랐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전장을 벗어나 있었다. 가슴속에 아려오는 고통은 플라즈마 캐논의 화염보다도 뜨거웠다.
퇴각하는 동안에도, 류진의 뇌리에는 엘시아의 눈빛과 그들의 비밀스러운 맹세가 맴돌았다. 인간 연합의 에이스 파일럿이자, 이종족에 대한 증오를 주입받은 전사. 동시에, 금지된 사랑에 갇혀 버린 한 남자. 그의 심장은 언제나 두 개의 진실 사이에서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를 지키겠다는 맹세. 그리고 인류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
이 끝나지 않는 전쟁 속에서, 과연 그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불타오르는 우주를 뒤로하고, ‘천랑’은 고독한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류진의 입술에서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엘시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