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화: 그림자의 밀회, 핏빛 달 아래**
어둠이 짙게 깔린 숲은 낮의 장난기마저 집어삼킨 듯했다. 맹수의 울음소리도,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조차도 침묵 속에서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현은 삐죽 튀어나온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북처럼 불안하게 울려댔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밤, 이곳에 온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지 않고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었다. 그것이 금지된 맹세이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기꺼이 그 운명에 몸을 던질 각오였다.
“이현.”
기척조차 없이, 그녀는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차가운 달빛 아래서도 온기를 잃지 않는 은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숲의 정령이라도 되는 듯, 그녀의 발걸음은 풀잎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월영족 특유의 금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났다. 그 속에 담긴 깊은 슬픔과 애정은 이현의 심장을 죄어왔다.
“리엘.”
그는 겨우 한숨처럼 그녀의 이름을 뱉었다. 다가가려는 발걸음이 망설여졌다.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위태로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았지만, 오늘 밤은 그 칼날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진 듯했다.
리엘이 먼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이현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얼음장 같으면서도 신비로운 온기가 그의 피부에 스몄다.
“위험해. 오지 말았어야 했어.” 리엘의 목소리는 숲의 바람처럼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 속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현은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널 봐야만 했다. 소식이 들렸어. 인간 진영에서 ‘정화령’이 내려졌다고. 이 숲을 완전히 뒤집어놓을 작정인가 봐.”
리엘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 쪽에서도 수색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어. 숲의 장로들이 노발대발하고 계셔. 인간들과의 ‘월영 평화 조약’이 위태롭다고. 우리가 만난다는 걸 알면… 둘 다 살아남지 못해.”
그들의 사랑은 태초부터 금지된 것이었다. 인간과 월영족. 빛과 그림자처럼 공존했지만,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핏줄을 섞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 수십 년간 이어진 전쟁 끝에 간신히 맺어진 평화 조약은 두 종족의 교류를 엄격히 제한했고, 특히 이성 간의 만남은 죽음으로 다스려지는 대죄였다.
이현은 리엘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녀의 몸은 마치 갓 피어난 꽃잎처럼 연약했지만, 그 속에 담긴 의지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난 상관없어. 네 곁이라면, 어떤 운명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
리엘은 이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현… 너는 인간이야. 그리고 나는… 너희가 ‘요물’이라 부르는 월영족. 우리에겐 함께할 미래가 없어.”
“아니.”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야. 숨어 다니고, 도망치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을 찾을 거야.”
그때였다.
삭막한 숲의 침묵을 찢고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 바스락.
아주 미세한 소리였지만, 이현과 리엘은 동시에 몸을 굳혔다. 리엘의 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숲의 모든 소리에 익숙한 월영족의 감각은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이현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의 심장이 다시금 거세게 요동쳤다.
“인간의 발소리야. 한 명이 아니야… 셋, 아니, 넷 이상.” 리엘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사냥꾼들이야. 정화령… 시작된 거야.”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가 꽤 가까워진 듯했다. 이현의 귀에도 둔탁한 발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짧은 대화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이쪽으로 간 것 같다고!”
거친 사내의 목소리였다.
“월영족 놈들… 쥐새끼처럼 꼭꼭 숨어 다니는군. 족장께선 반드시 이 숲을 깨끗하게 만들라 하셨으니, 한 놈도 빠짐없이 잡아내야 할 것이다.” 다른 목소리였다. 인간 사냥꾼들… 그것도 월영족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이들이 분명했다.
이현은 리엘의 손을 꽉 잡았다. “숨어야 해. 어서!”
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현을 이끌고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빽빽한 덤불 속으로 파고들어 몸을 웅크렸다. 흙냄새와 풀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만큼이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 덤불을 헤치는 소리, 그리고 섬뜩하게 번뜩이는 횃불의 불빛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이현은 리엘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의 작은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또한 온몸의 근육이 경직된 채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찾으려는 듯, 사냥꾼들의 시선이 그들이 숨은 덤불 쪽으로 향했다.
“여기는 없는 것 같군.” 한 사냥꾼이 중얼거렸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사냥꾼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듯했다. 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리엘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눈빛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이현… 저기…”
리엘의 시선이 향하는 곳. 덤불 너머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맹수의 눈처럼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그들을 향해 천천히 돌려졌다. 그 그림자는 사냥꾼들이 지나쳐 간 방향이 아니라,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의 더 깊은 숲 속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사냥꾼들보다 훨씬 거대하고,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 붉은 눈동자가 그들의 존재를 정확히 꿰뚫어 본 순간, 덤불 위 나뭇가지가 바스스거리는 소리와 함께, 위에서 거대한 그물이 그들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