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27화

김민준은 낡은 사무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책상 위에는 지난 몇 주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지도 위를 가로지르는 붉은색 펜 자국은 좌절된 추적의 경로를, 빼곡히 적힌 이름과 연락처들은 헛된 희망의 잔해를 보여주었다. 서연, 한서연. 그의 첫사랑의 이름은 이제 단순한 음절이 아니라, 그의 삶을 지탱하는 동시에 짓누르는 거대한 미로가 되어 있었다. 스물일곱 번째 장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매듭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창밖은 회색빛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물들이고 있었다. 해 질 녘의 쓸쓸함은 민준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종종 자신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꿈속을 헤매는 탐정 같다고 생각했다. 매번 실낱같은 희망을 좇아 나아가지만, 결국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림자를 쫓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서연의 미소가, 그녀의 눈빛이, 그의 심장 깊은 곳에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었기에.

그때, 책상 한쪽에 놓인 낡은 플립폰이 윙하고 울렸다. 민준이 개인적인 용무나 오래된 인연과의 연락에만 쓰는 전화였다. 액정에 뜬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최 할머니’ – 서연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살았던 낡은 아파트의 건물주 할머니였다. 서연이 갑자기 사라진 후에도 민준이 가끔 안부를 묻곤 했던 유일한 인연 중 한 명이었다.

“할머니, 무슨 일이세요?” 민준은 평소보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최 할머니는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민준이 너, 혹시 서연이 찾고 있댔지? 내가 얼마 전에 동네 소식지에 실린 기사를 하나 봤는데… 아무래도 서연이 이야기인 것 같아서 말이야.”

민준의 귀가 번쩍 뜨였다. “네? 어떤 기사인데요, 할머니?”

“여기, 우리 동네 작은 골목에 있던 ‘초록별 갤러리’라고 있었거든. 거기 사장이 ‘박은하’라는 여자였는데, 꽃을 눌러서 그림을 만들고… 또 동네 곳곳에 작은 조약돌에 그림 그려서 숨겨두는 걸 좋아했대. 기사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 서연이도 어렸을 때 그랬잖아. 작은 돌멩이에 그림 그려서 나 몰래 현관 앞에 놓아두곤 했지.”

압화(pressed flower) 미술. 조약돌에 그림 그리기. 민준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있었다. 서연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을 사랑했고, 특히 작은 들꽃들을 채집해 낡은 책갈피에 끼워 넣거나 직접 만든 공책에 섬세하게 붙여두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동네 골목을 걸을 때마다 예쁜 돌멩이를 주워다 작은 그림을 그려 남몰래 숨겨두곤 했다. 그 습관은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놀이였다. 이 두 가지 특징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서연다웠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단서였다.

“할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 갤러리 이름이랑 사장 이름 다시 한번만 알려주세요.”

최 할머니에게서 들은 정보는 민준에게 꺼져가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초록별 갤러리’는 최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번화가에서 한참 떨어진 오래된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이 도착했을 때, 갤러리는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텅 비어 있었고, 먼지가 희뿌옇게 쌓여 있었다. ‘임대’라는 글자가 붙은 낡은 종이 한 장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민준은 갤러리 옆의 작은 철물점 주인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 갤러리 사장님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철물점 주인은 인상 좋은 중년 남성이었다.
“아, 초록별 갤러리 박 사장님 말이요? 얼마 전에 갑자기 문 닫고 이사 갔어요. 사람 참 조용하고 착했는데, 눈빛이 좀 슬퍼 보였지. 무슨 일 있으신가 했는데, 그냥 갑자기 사라지듯 떠났어. 짐도 급하게 빼더라고.”

“혹시… 박은하 씨 사진이라도 보신 적 있으신가요?” 민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작년인가, 동네 소식지에 얼굴 한번 실린 적이 있었지, 갤러리 홍보한다고. 근데 그거 말고는 딱히.”

민준은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초록별 갤러리 박은하’를 검색했다. 몇 개의 오래된 지역 신문 기사와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물이 나타났다. 그중 한 기사에 실린 작고 흐릿한 사진. 여자의 얼굴은 다소 야위어 있었고, 머리 스타일도 달라 보였다. 하지만 민준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눈빛.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동시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희망을 담고 있는, 서연의 눈이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찾았다. 아니, 찾은 것 같았다. 서연이 틀림없었다. 이름은 바꿨지만, 그녀의 예술적 감성과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희망의 불길이 타오르는 동시에, 새로운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왜 그녀는 이름을 바꿨을까? 왜 그렇게 급하게 사라졌을까? 철물점 주인의 말처럼 ‘슬픈 눈빛’과 ‘갑작스러운 이사’는 평범한 이유가 아닐 터였다. 민준은 검색을 이어갔고, 이내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박은하’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초록별 갤러리’가 문을 닫기 몇 달 전, 한 차례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는 기사였다. 투자 사기와 관련된 복잡한 소송이었고, 박은하가 피해자라는 내용이었다. 기사 말미에는 그녀가 소송으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으며,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다는 언급이 있었다.

민준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질 뻔했다. 서연은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숨어버린 것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첫사랑을 찾아 헤맨 오랜 시간의 끝에서 그는 그녀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겪었을 고통과 위험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쁨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민준은 다시 갤러리 건물 앞으로 돌아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은 더욱 음산하게 느껴졌다. 그는 유리창에 바싹 붙어 갤러리 내부를 다시 한번 살폈다. 텅 빈 공간의 한쪽 구석, 벽과 바닥의 틈새 사이에 무언가 작고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민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재빨리 건물 뒷문으로 향했다. 잠겨있어야 할 문은 낡은 자물쇠가 허술하게 걸려 있었다. 그는 자물쇠를 부수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공기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민준은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아까 보았던 틈새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작은 투명 레진 펜던트가 떨어져 있었다. 펜던트 안에는 섬세하게 눌러 말린, 붉은빛을 띠는 작고 앙증맞은 클로버 꽃이 박혀 있었다. 서연이 가장 좋아했던 꽃 중 하나였다. 그리고 펜던트 뒷면에는 아주 작게 새겨진 문양이 있었다. 옅은 하트 안에 새겨진, 서연의 이름 첫 글자 ‘S’를 닮은 필기체. 그 옆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희미한 숫자들의 나열, 마치 좌표 같은 것이 흐릿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민준의 손이 떨렸다. 이것은 서연의 것이 확실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어쩌면 그에게 보내는 마지막 단서일지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메시지였다. 그는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레진 속 작은 클로버는 마치 서연의 심장처럼 뛰는 듯 느껴졌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사랑의 그림자에 한 발짝 더 다가섰지만, 민준의 마음은 희망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의 첫사랑은 위험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