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7화: 찢겨진 맹세의 향기
어둠은 익숙했고, 고통은 더 익숙했다. 이세계로 넘어온 지 햇수로 3년.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내며, 나는 이 찢겨진 육신에 새로운 힘을 새겨 넣었다. 이제 내 피는 복수심으로 끓어오르는 용암이고, 내 심장은 증오의 북소리를 연주하는 악기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화려했다. ‘엘드리아’라 불리는 이 거대한 강철 도시는 과거 내가 살았던 세계의 그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마력 증폭기가 뿜어내는 푸른 빛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수많은 공중 부유선들이 거대한 날갯짓으로 밤하늘을 수놓았다. 저 모든 화려함 아래, 역겨운 냄새가 났다.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배신의 냄새가.
“보고드립니다, 영주님.”
차가운 돌 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으로 그림자처럼 스며든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이름은 카일. 그림자 길드의 정보 요원 중 한 명으로, 내게 이 도시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주는 심복이었다. 내 눈빛 한 번에 제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된, 충직한 사냥개.
나는 낡은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와인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붉은 액체가 잔 속에서 파도를 치다 이내 잔잔해졌다. 내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내 진짜 모습은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줄 때가 아니었으니까.
“말해라.”
내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음성에 카일은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그는 이따금 내게서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에 익숙해질 법도 했건만, 매번 새로운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정보 길드를 통해 입수한 최신 소식입니다. 며칠 전, 동부 대륙의 무역선 한 척이 침몰했습니다. 단순한 해적의 소행으로 보고되었으나… 잔해를 조사한 결과, 일반적인 해적단의 공격으로는 보기 힘든 마법 문양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카일의 말에 나는 와인잔을 든 손을 멈췄다. 마법 문양. 이 세계의 마법은 대부분 자연의 힘을 빌리거나 정령과의 계약을 통해 발현된다. 하지만 일부는 고대의 문명에서 전해 내려오는 특수한 문양을 통해 비정상적인 힘을 끌어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들은, 내가 아는 한, 이선우가 발을 들여놓았던 금지된 영역의 그것과 유사했다.
“그래서?”
나는 턱을 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끓어오르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그 문양은… 과거 ‘검은 새벽단’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은 멸종된 줄 알았던 고대 마법의 흔적이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문양의 일부가… 저희가 찾고 있던 ‘푸른 그림자의 눈’이라는 아티팩트를 활성화하는 데 쓰인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푸른 그림자의 눈. 이선우가 이곳에 넘어와서도 끊임없이 찾아 헤맸던 유물 중 하나였다. 그가 그토록 갈구했던, 미지의 힘을 품고 있다는 전설 속의 보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설마, 설마 이선우가 벌써 그 힘을 손에 넣으려 움직이고 있는 건가? 그 배신자가?
“누가 그 배를 공격했지? 검은 새벽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하 세계에서는 소수의 생존자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그들의 그림자가 도시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습니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들의 뒤에는… 새로운 후원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검은 새벽단의 잔당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의 ‘그림자’라고 불리며, 최근 몇 달 사이에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림자. 이선우, 네가 또다시 이름을 숨기고 그림자 속에서 기어 다니는구나. 역겨운 위선자.
내 눈앞에 다시 그날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함께 목숨 걸고 연구했던 금단의 힘. 동료들이 쓰러져 갈 때, 내게 도움을 청했던 이선우의 절박한 목소리. 그리고… 내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그의 손에 쥐여주었던 힘의 정수.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섬뜩한 미소. 내 등 뒤에 꽂힌 비수가 차가웠다. “진우야, 미안하다. 이건… 나를 위한 거야.” 그의 속삭임은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이 세계로 버려졌다. 죽어가는 몸으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이곳에 떨어졌다. 복수를 향한 일념만이 나를 살게 했다.
“그 후원자의 정체를 알아냈나?”
내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카일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아직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만… 그들의 활동 방식, 그리고 특정 정보를 추적한 결과,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말해라.”
“그들이 움직이는 곳마다, 늘 특정 마법 공학 기술이 사용됩니다. 저희 길드에서는 그것을 ‘미명(未明)의 기술’이라 부릅니다. 아직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진보된… 그리고 위험한 기술입니다.”
미명의 기술. 내가, 그리고 이선우가 함께 연구했던, 과거 세계의 마법 공학 기술을 이 세계에 맞춰 변형시킨 것. 이선우, 너는 기어이 이곳에서도 그 더러운 재능을 썩히고 있구나.
와인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쨍그랑, 하고 유리잔이 금이 가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카일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검은 새벽단 잔당들의 본거지를 알아내라.”
“예, 영주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미명의 기술’을 사용하는 자들을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내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이선우, 네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힘을 모았든, 얼마나 깊은 그림자 속에 숨었든 상관없다. 내가 널 찾아낼 것이다. 내가 직접, 네 목덜미를 움켜쥘 것이다.
카일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이내 방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텅 빈 방에 홀로 남았다. 붉은 와인 잔 속의 균열은 마치 내 심장에 새겨진 복수의 흉터 같았다. 쨍그랑, 하고 결국 잔이 산산조각 났다. 붉은 와인 방울이 손등에 튀어 올랐다. 마치 피처럼 선명하게.
**“이선우… 기다려. 찢겨진 맹세의 대가는… 피로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응시했다. 화려한 엘드리아의 야경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동부 대륙의 지평선이 보였다. 그곳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진 배신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이제 사냥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나의 잔혹한 사냥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