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707호의 이상한 바람**
밤 11시, 지훈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도시의 불빛은 창밖으로 아득하게 흩어져 있었고, 실내는 조명 아래서 고요했다. 길고 긴 코딩 작업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마감은 코앞이었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으려 잔을 들었을 때였다.
‘딸깍.’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펜 하나가 스스로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린 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젠장, 또야?”
지훈은 투덜거리며 펜을 주웠다. 지난주부터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 책상 위의 서류가 갑자기 흩어지거나, 침대 맡 스탠드가 혼자 깜빡이거나. 처음에는 자신이 건드렸겠거니, 혹은 노후 아파트의 잦은 고장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 건물은 지어진 지 꽤 된 터라, 이런 소소한 문제들은 일상이었다.
다시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쉬이익—’
창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도, 마치 틈새로 바람이 스며드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동시에 거실 중앙에 놓인 작은 화분에서 나뭇잎 하나가 파르르 떨리더니,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분명 실내 온도는 25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착각이겠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야.”
지훈은 애써 합리화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찜찜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아파트에 이사 온 후부터, 유독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꿈자리는 항상 사납고, 아침에는 온몸이 뻐근했다.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찝찝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날 밤, 지훈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뒤척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30분. 그 순간, 침대 머리맡에 놓인 물컵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한 진동이었다. 하지만 곧,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컵을 쥔 것처럼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찰랑이는 물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독 크게 울렸다.
지훈은 숨을 멈췄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진인가?’
아니. 주변의 모든 것이 고요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도 아니었다. 오직 물컵만이, 기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 뭐야…”
작게 중얼거리는 순간, 컵은 그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누군가 놓쳐버린 듯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지훈은 스프링 침대 위에서 얼어붙었다.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깨진 유리의 파편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파편들은 마치 섬뜩한 눈동자들 같았다.
‘이건… 이건 꿈이 아니야.’
더 이상 착각이나 피로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이 아파트, 707호에 자신 말고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지훈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퀭한 눈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준영아. 나 지훈인데.”
수화기 너머로 친구의 졸린 목소리가 들렸다.
“어? 왜 이렇게 일찍 전화했냐? 뭔 일 있어?”
“나… 이상한 일이 있었어. 어제 밤에….”
지훈은 어제 있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펜이 떨어지고, 차가운 바람, 그리고 깨진 물컵까지. 준영은 처음에는 하품을 했지만, 점차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야, 너 요새 일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는 거 아니냐? 정신과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진짜라니까! 이건 그냥 스트레스가 아니야. 뭔가… 뭔가 여기 있어.”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목소리에는 공포와 함께,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섞여 있었다.
“집에 혼자 있기 무서워서 그래. 혹시 오늘 우리 집으로 올 수 있냐? 아니, 하다못해 다른 곳에서 자더라도….”
준영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 지훈아. 나 오늘 가족 여행이라서… 진짜 안 돼.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도 그렇고.”
지훈은 실망했지만, 애써 괜찮은 척했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보자.”
전화를 끊자마자, 온몸을 휘감는 외로움과 공포가 더욱 강하게 몰려왔다. 지훈은 벌떡 일어나 집 안을 살폈다. 모든 것이 어제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깨진 컵의 파편은 조용히 바닥에 놓여 있었고, 펜은 여전히 테이블 한구석에 있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마치 무엇인가가 숨죽이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
지훈은 결국 그날 밤, 친구의 조언대로 짐을 꾸렸다. 당장 나갈 곳은 없었지만, 이 공간에 더 이상 혼자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방에 대충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겨 넣고,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덜컥!’
현관문이, 마치 안에서 잠긴 것처럼 굳게 움직이지 않았다. 지훈은 몇 번이고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잠금장치를 확인했지만, 분명 열림 상태였다.
“뭐야? 왜 안 열려?”
지훈은 온몸의 힘을 다해 문을 밀고 당겼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문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 안쪽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거실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거실 테이블 위, 지훈이 급하게 싸다 만 가방 옆에 놓여 있던 그의 노트북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화면이 깨진 채, 검은 액정이 섬뜩하게 번져갔다.
“안 돼….”
지훈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자신을 이 아파트에 가두려는 듯한 명백한 의지가 느껴졌다.
거실의 불빛이 ‘깜빡, 깜빡’ 거리더니 이내 완전히 꺼졌다. 온 집안은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어디선가 싸늘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마치 존재하지 않는 문이 열린 듯 ‘끼이익’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흑… 흐윽….’
아이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늙은 여인의 신음 같기도 한 섬뜩한 소리였다.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지고, 지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지훈은 이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공포가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현관문에서 멀어져, 거실 중앙으로 다가섰다. 어둠 속에서 흐느낌은 잦아들었지만, 그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득…득…득…’
무언가가 바닥을 긁으며 다가오는 소리. 마치 손톱이나 날카로운 무언가로 마룻바닥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소리는 지훈의 발치에서부터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지훈은 무릎이 휘청거렸다. 주저앉을 것만 같은 공포 속에서, 그는 간신히 시선을 어둠 속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흐릿한 형체였다.
아니, 형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비정상적인 모습. 마치 검은 연기가 뭉쳐진 듯한, 그러나 그 안에 섬뜩한 붉은 빛이 일렁이는 존재였다. 그것은 지훈의 눈앞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늘처럼 번들거리는 피부, 길게 늘어진 사지, 그리고 가장 끔찍한 것은, 그 존재의 중심에서 거대한 눈이 지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눈은 마치 심연의 어둠을 그대로 담은 듯 검고 깊었지만, 그 안에선 불타는 숯처럼 붉은 광기가 번뜩였다. 지훈은 그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기이하고 끔찍한 이미지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죽음과 절규, 그리고 알 수 없는 고대 언어로 쓰인 듯한 문자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유령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 707호에 갇힌 것은, 어떤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였다. 그리고 그 존재는 지금, 지훈을 먹잇감으로 삼고 있었다.
지훈의 심장이 폭발할 듯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눈에도 알 수 없는 푸른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포에 질린 눈빛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엇인가에 반응하는 듯한, 본능적인 각성의 빛이기도 했다.
‘젠장…!’
지훈의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은, 목구멍 속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그 존재는, 차갑고 섬뜩한 미소를 짓는 듯했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아파트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그는 이 미지의 존재에게 영원히 속박될 것이라고. 아니, 어쩌면 그 존재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야 했다. 이 기괴한 공간, 707호에서.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시작이었다. 현대 도시 한복판, 평범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차원 너머의 거대한 서사시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