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어나는 독초의 왈츠 (The Waltz of Blooming Poison)
짙은 루비색 드레스 자락이 무심하게 바닥에 흩어졌다. 거울 속 여인은 완벽했다. 섬세하게 올라간 눈꼬리, 아치형으로 그려진 눈썹 아래로 형형한 빛을 뿜어내는 눈동자, 그리고 붉은 독을 머금은 듯 도발적인 입술. 강지우는 제 모습을 낯선 이라도 되는 양 훑어봤다. 1년 전, 폐허 속에 홀로 버려졌던 과거의 자신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야.”
작게 읊조린 목소리는 매끄러운 비단처럼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강철이 감춰져 있었다. 오늘 밤, 그 피와 땀으로 일궈냈던 모든 것을 가로채 간 배신자와 다시 조우하는 날이다. 심장이 뜨거워졌다. 복수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미친 듯이 솟아오르는 전율이 몸을 휘감았다.
고급 리무진에서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그녀는 가볍게 눈을 가늘게 떴다. 웅장한 연회장 입구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 경박한 웃음소리, 온갖 가식적인 찬사가 뒤섞여 공기를 가득 채웠다. 지우는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무대는, 지금부터였다.
등 뒤로 묵직한 문이 닫히고,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며 우아한 소리를 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우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연회장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중앙에 마련된 시상대. 그리고 그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
혜진이었다.
지우의 심장이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혜진은 그 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완벽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마치 그 모든 영광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역겹게도. 지우의 발걸음은 혜진을 향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을 갈라놓았던 과거의 간극을 좁혀나가면서.
“혜진아, 수상 정말 축하해. 대단하다, 정말.”
지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친근하고 다정해서,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혜진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미소가 굳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당황스러움과 경계심이 스쳤지만, 이내 능숙하게 감췄다.
“지우? 네가 어떻게… 아니, 오랜만이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잖아.”
혜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우를 껴안는 시늉을 했다. 지우는 그 얄팍한 포옹을 자연스럽게 받아냈다. 그리고 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놀라긴. 앞으로 더 자주 보게 될 텐데.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혜진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녀는 지우에게서 떨어져서 다시금 환한 미소를 가장했다.
“그랬구나. 어쩐지 네가 보고 싶더라니. 연락이라도 주지 그랬어.”
“연락? 글쎄. 내가 사라졌을 때, 네가 나를 찾아 나설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지우의 눈빛이 스쳐 지나가듯 차갑게 빛났다. 혜진은 그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때, 묵직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혜진 씨, 이쪽은 누구신가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지우는 고개를 돌렸다. 훤칠한 키, 시선을 압도하는 존재감.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 강태준이었다. 사업 파트너로 몇 번 스치듯 만났던, 그러나 지우의 레이더에 잡혔던 적은 없던 남자. 이제는 혜진의 성공 뒤에 자리한 그림자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혜진은 얼른 표정을 정돈하고, 강태준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태준 씨. 이쪽은 제 옛 친구, 강지우예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오랜만에 나타났네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라니. 기가 막혔다. ‘추락해서 바닥을 기다가’라고 정정해주고 싶었다. 지우는 빙긋 웃으며 강태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지우라고 합니다. 혜진이에게 제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겠죠. 워낙 입이 가벼워서.”
혜진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강태준은 지우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솔직하고도 날카로운 말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강태준입니다. 지우 씨 이야기는… 뭐, 여러 가지 경로로 들었습니다만,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생각보다… 강렬하군요.”
그의 시선이 지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평가하는 듯했지만, 그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강렬하다니요. 그냥 무난한 사람인데.”
지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손을 놓았다. 혜진은 그들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끼어들었다.
“태준 씨, 저쪽에 중요한 손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지우, 우리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자.”
혜진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강태준은 시선을 지우에게서 떼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지우 씨와는 좀 더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지네요.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될 기회가 있을까요?”
그의 말은 능글맞으면서도 도전적이었다. 지우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운명이 장난을 좋아한다면요.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겠죠.”
지우는 강태준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혜진을 향해서는 다시금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을 던졌다.
“그럼 혜진아, 오늘 즐거운 밤 보내. 앞으로 네 삶이 훨씬 더 ‘즐거워질’ 테니까.”
지우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군중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혜진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고, 강태준은 그 모든 상황을 흥미진진하다는 듯 지켜봤다.
지우는 연회장 한쪽 구석에 마련된 테라스로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켰다.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귓가에는 혜진의 당황한 목소리, 그리고 강태준의 능글맞은 시선이 맴돌았다.
‘이제 겨우 시작이야, 혜진아.’
그녀의 입술이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이젠 더 이상 추락할 바닥은 없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복수의 칼날. 그리고 그 칼날은, 이제 막 피어나는 독초처럼 아름답고 치명적일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