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동해진에 도착한 현우는 창밖으로 펼쳐진 회색빛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낡은 지도에 표시된 작은 점 하나. 그 점이,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를 안고 현우는 이 외딴 해안 마을까지 달려왔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낡은 금고 속에서 발견된 희미한 사진 한 장. 그 사진 속 은채의 손목에 채워진 닳아빠진 팔찌가, 과거 동해진 보금자리 요양원에 머물렀던 한 여성 환자의 기록에 언급된 팔찌와 일치한다는 제보를 받았을 때, 현우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수많은 헛된 발걸음과 절망 끝에 찾아온, 너무나도 작고 깨지기 쉬운 희망이었다.
동해진 보금자리 요양원
요양원 입구는 쇠락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페인트는 벗겨지고, 녹슨 철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현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약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섞인 공기가 그를 감쌌다. 낡은 안내 데스크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이 졸고 있었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이은채라는 분에 대해 문의할 것이 있어서요.”
노인은 눈을 비비며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눈빛에는 피로와 무관심이 섞여 있었다. “이은채? 그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 여기는 노인들이 대부분이야.”
현우는 은채의 사진을 내밀었다. “이 분입니다. 한 20년 전쯤, 그러니까 20대 초반이었을 겁니다.”
노인은 돋보기를 꺼내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런 젊은 사람은 기억에 없어. 그 시절에는 젊은 환자가 거의 없었으니까.”
현우의 어깨가 축 처졌다. 또다시 헛수고인가.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고통에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 실마리일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그를 다시 일으켰다.
“혹시… 다른 이름으로 입원했을 수도 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특징이라도… 가령, 팔찌를 차고 있었다거나, 그림을 잘 그렸다거나 하는…”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림? 팔찌? 아, 그 아이…!”
현우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기억나십니까?!”
“박선생님이라면 아실 거야. 그 시절 병동 간호사였지. 지금은 은퇴하고 요양원 근처에서 혼자 사셔. 나이 드니 기억력이 오락가락해서… 하지만 그 아이는 박선생님이 각별히 챙겼어.”
현우는 노인에게서 박 간호사의 주소를 받아들고, 희미한 등불을 발견한 사람처럼 황급히 요양원을 나섰다.
박 간호사의 기억
박 간호사의 집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낡았지만 정돈된 마당에는 색색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 현우가 초인종을 누르자, 온화한 인상의 노년 여성이 문을 열었다. 그녀의 눈빛은 요양원의 노인과는 달리 맑고 또렷했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소개하고, 은채의 사진을 내밀었다. 박 간호사는 사진 속 은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련한 슬픔과 따뜻함이 교차했다.
“이 아이… 김미연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었지. 본명이 아니었어. 꽤 오랜 시간 여기 있었지… 아팠던 아이였어. 그런데 그림을 정말 잘 그렸어. 늘 창가에 앉아 바다를 그리곤 했지. 손목에는 늘 이 팔찌를 차고 있었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특이한 팔찌였지.”
현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맞았다. 은채는 그곳에 있었다. 스쳐 지나간 시간 속, 그녀는 이곳에서 아픔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그림을 그렸나요? 혹시… 특징적인 그림이 있었나요?” 현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박 간호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음… 늘 등대를 그렸어. 동해진의 상징 같은 거니까. 그런데 어느 날인가, 평소와 다른 그림을 그렸지. 저기 아래쪽 갯바위 절벽에 있는, 옆으로 눕다시피 자란 소나무 말이야. 바람에 몸이 꺾여 기이한 형상을 한 그 소나무를 정교하게 그렸어. 그러면서 눈물을 한참 흘리더군. 그 그림은 아마… 누군가와의 추억이 담긴 그림이었을 거야.”
현우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섬광이 스쳤다. 갯바위 절벽의 기이한 소나무. 그곳은 은채와 현우가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둘만의 아지트. 은채는 그곳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은채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박 간호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느 날 갑자기 퇴원했어. 서둘러 떠난 듯했지.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니었는데… 한동안 여기로 편지가 몇 통 왔었어. 동해진의 ‘새싹 보육원’으로 전달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새싹 보육원. 현우의 머릿속에 새로운 지도가 그려졌다. 은채는 요양원을 떠나 보육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체 왜? 그녀는 그곳에 아는 사람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던 걸까.
새싹 보육원, 그리고 작은 상자
박 간호사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 현우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 질 녘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희망과 불안감 사이를 오가며 빠르게 뛰었다. 은채가 그곳에 있었다는 확신, 그리고 그녀가 남긴 흔적을 따라갈 수 있다는 기대감. 그러나 동시에, 왜 그녀가 그곳에 숨어들듯 머물렀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새싹 보육원은 요양원에서 멀지 않은 작은 언덕에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여느 보육원과 달리, 이곳은 유난히 조용했다. 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원장실에서 나온 여인이 현우를 맞았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이은채라는 분을 찾고 있습니다. 20년 전쯤… 이곳으로 편지가 몇 통 왔었다고 해서요.”
원장은 현우의 설명을 듣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은채… 아, 그분! 미연 씨라고도 불렸던 것 같은데. 저희 보육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었어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고, 잘 돌봐줬죠. 그림도 가르쳐주고… 아이들이 ‘은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랐어요.”
은채가 자원봉사를? 현우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마주했다. 아팠지만, 여전히 타인을 보듬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은채. 그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렀나요?”
“글쎄요, 한 1년 정도?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났어요. 편지 한 통만 남기고… 아이들은 한동안 많이 슬퍼했죠.” 원장은 서랍을 뒤적였다. “아, 여기 있네요. 은채 선생님이 떠나면서 맡긴 상자예요. 혹시 나중에라도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으면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본인 물건 중에 소중한 것이라면서…”
원장이 현우에게 건넨 것은 낡고 작은 나무 상자였다. 먼지가 앉아 있었지만, 현우의 손에 닿는 순간, 그 상자 속에서 은채의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바래고 구겨진 편지 한 통, 그리고 손때 묻은 작은 스케치북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스케치북을 펼치자, 첫 장에는 연필로 섬세하게 그려진 갯바위 절벽의 소나무 그림이 나타났다. 그 아래에는 은채의 필체로 작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기억나니, 현우야?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현우는 상자 속 편지를 꺼냈다. 낡은 종이 위에는 은채의 필체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현우의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 편지 속에는 그녀가 사라져야 했던 이유, 그리고 그가 반드시 찾아야 할 새로운 단서가 담겨 있었다. 어두워지는 동해진의 바닷가에서, 현우는 은채의 흔적을 쥔 채, 또 다른 미지의 여정 앞에 서 있었다. 상자 속 마지막 물건은, 그녀가 항상 차고 있던 그 팔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