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검은 칼날처럼 도시의 잿빛 심장을 가르고 있었다. 부서진 아스팔트 바닥에 비친 내 그림자는 길고도 찢겨 있었다. 폐허가 된 상점가의 유리 파편들이 발걸음마다 서걱거렸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잔해들은 내가 지난 일 년간 겪었던 파괴를 고스란히 닮아 있었다.
일 년. 딱 일 년이었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버린 그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은채를 쫓아, 이 찢겨나간 도시의 잔해 속을 헤맨 시간. 내 모든 것을 불태워야만 겨우 끌어올릴 수 있는 마력의 조각들을 움켜쥐고, 그녀의 흔적을 쫓아 이 지옥을 가로지른 시간.
손가락 끝이 시려 왔다. 검은 가죽 장갑 위로도 스며드는 한기. 그 한기는 단순히 밤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안에서 들끓는 서늘한 분노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심장이 차갑게 뛰었다. 더 이상 뜨거운 슬픔은 없었다. 오직, 차가운 복수심만이 남아 내 맥박을 대신했다.
저 멀리, 낡은 오벨리스크 광장 쪽에서 희미한 빛의 잔영이 깜빡였다. 익숙한 마력의 파동. 한때 내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빛. 지금은, 역겹게만 느껴지는 빛.
“찾았다.”
내 목소리는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갈라졌다. 더 이상 울음기 따위는 묻어나지 않았다. 그저 지독한 갈증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밤바람에 흩날렸다. 더 이상 길고 아름다운 변신은 필요 없었다. 내 안의 마력은 이제 변신 따위의 허례허식을 거치지 않고도 날개를 돋우고, 발톱을 세웠다.
어둠 속을 가로지르며, 붕괴된 건물 잔해들을 훌쩍 뛰어넘었다. 녹슨 철근들이 으스스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부서진 간판들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이곳은 한때 우리가 함께 지켜냈던 평화로운 거리였다. 사람들이 웃고, 아이들이 뛰놀던 그 평화. 은채, 네가 산산조각 내버린 그 모든 것들.
오벨리스크 광장 중심부. 마력으로 뒤틀린 시계탑 아래, 은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부서진 도시의 잿빛 풍경 속에서도 홀로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환영 같았다. 순백의 마법소녀 복장, 손에 든 화려한 지팡이. 그리고… 그 따뜻했던 미소. 내 가슴을 찢어놓았던 바로 그 미소.
그녀의 시선이 느리게 이쪽으로 향했다.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놀람. 그리고… 경멸?
아니, 아마도 약간의 연민일 수도. 내가 이 비참한 모습으로, 망령처럼 그녀 앞에 나타난 것에 대한.
“아리?”
은채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한때 나를 다정하게 불렀던 그 목소리. 지금은 비수처럼 박혀들었다.
“정말 끈질기네. 설마 아직도 나를 쫓아다닐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폐허 위로 메아리쳤다.
나는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다가섰다. 발밑에서 돌멩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그녀의 웃음소리를 지웠다.
“은채.”
내 목소리는 그녀의 것보다 훨씬 거칠었다.
“왜 그랬어.”
은채는 지팡이를 가볍게 돌렸다. 빛나는 보석들이 푸른 섬광을 뿌렸다.
“왜냐니? 네가 지키려던 이 세상은, 사실 지킬 가치도 없었으니까. 모두가 잠든 사이 몰래 깨어나 마법의 힘을 탐하는 이기적인 존재들. 그저 허울 좋은 평화에 취해 스스로를 속이는 어리석은 인간들. 내가 그들 대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주려고 했을 뿐이야.”
“거짓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넌 그저 더 많은 힘을 원했을 뿐이야. 우리의 희생을, 내 믿음을 짓밟고서라도.”
“그래서, 이제 와서 날 막겠다는 거야? 파편이 되어버린 힘으로? 너는 이미 그날 모든 걸 잃었잖아.”
그녀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네 동생을, 그리고 네 빛을.”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이 다시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숨조차 쉬지 않고 버텼다.
“잃은 건 아무것도 없어. 난 네게서 모든 걸 되찾을 거야. 네가 내게서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내 손바닥에서 검은 빛의 파동이 일렁였다. 한때는 순수하고 투명했던 마력. 이제는 어둠을 머금고, 날카롭게 변형된 빛. 그것은 복수심에 물든 내 심장 그 자체였다.
“네게서 빼앗아 간? 착각하지 마. 내가 가진 건 전부 내 것이야. 너는 그저 약해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을 뿐.”
은채가 지팡이를 앞으로 겨누었다. 눈부신 푸른빛이 광장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편히 잠들지 그래, 아리. 어둠 속에서 영원히.”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거대한 마력의 구체가 형성되었다. 한때는 치료와 보호의 상징이었던, 이제는 섬뜩하게 느껴지는 빛의 구.
나는 그 빛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내 눈동자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차갑게 타오르는 복수심만이 가득했다.
“편히 잠들 사람은… 네년이야, 은채.”
내 손에서 뻗어 나간 검은 파동이 은채의 마력 구체를 향해 쏘아졌다. 파지지직, 섬뜩한 소리를 내며 검은 빛과 푸른 빛이 충돌했다. 광장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시계탑의 균열이 더욱 벌어지고, 주변 건물들의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감히… 이 정도 힘으로!”
은채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당황한 빛이 스쳤다.
내 검은 파동은 은채의 마력 구체를 꿰뚫고 지나가, 그녀의 지팡이 끝을 강타했다.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지팡이에서 푸른 섬광이 흩뿌려졌다. 은채의 손에서 지팡이가 흔들렸다.
“어떻게… 네가 아직 그런 힘을…!”
은채의 목소리에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분노와 놀람이 뒤섞인 감정.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마력이 내 몸을 감싸고, 내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뱀처럼 솟아올랐다.
“이제부터… 네가 짓밟았던 모든 것들의 무게를 짊어지게 될 거야. 은채.”
그림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은채를 향해 뻗어나갔다. 달빛마저 삼켜버릴 듯한, 깊고 검은 어둠.
“이것이… 네가 내게 남긴 전부이자… 내가 네게 돌려줄 모든 것이야.”
어둠의 촉수들이 은채의 발밑을 휘감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완전히 미소가 사라졌다. 공포. 그래, 드디어 그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나는 만족했다.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하겠지만.
내 복수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이 일 년간의 지옥 속에서 내가 얻은 유일한 진실은, 고통을 되갚아주는 것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