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36화

차가운 밤공기가 낡은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 리나의 뺨을 스쳤다. 그녀는 오래된 석조 건물 가장 깊숙한 곳, 먼지가 수북이 쌓인 서재에 앉아 있었다. 촛불의 희미한 불빛이 탁자 위에 놓인 고문서의 빛바랜 글자들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어제 밤 꿈에서 본 파편 같은 기억이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어둠 속에서 울리는 아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절박함으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리나는 한숨을 쉬며 등받이 없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머릿속은 혼돈의 미로 같았다. 시간 여행 중 기억을 잃은 지 수년, 이제 겨우 몇 개의 조각들을 맞춰가고 있었지만, 그 조각들은 거대한 퍼즐의 가장자리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 ‘리나’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시간을 넘나들었는지, 어떤 임무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진정 누구였는지 알 수 없었다.

탁자 위,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펜던트가 촛불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빛났다. 며칠 전 발견된 이 펜던트는 그녀의 기억 파편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와 놀랍도록 일치했다.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특정 주파수에 반응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펜던트의 한쪽 면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다른 한쪽 면에는 식별하기 어려운 희미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리나는 그것을 만질 때마다 어딘가 아련한 슬픔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연결감을 느꼈다.

“젠장…”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지, 내 과거는?”

문득, 펜던트에서 미약한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훨씬 강렬했다. 주변의 다른 유물들과 공명하는 듯, 서재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펜던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진동은 서재의 가장 오래된 서가 뒤편에서 가장 강하게 울렸다. 낡은 책들을 밀어내자, 마른 나무 냄새와 함께 차가운 돌벽이 드러났다. 벽에는 펜던트의 문양과 일치하는 희미한 새김이 있었다.

리나는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새김에 갖다 댔다. 순간, 펜던트는 마치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벽에 흡착되었고, 서재 전체가 거대한 엔진처럼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석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며,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 안에서는 신비로운 푸른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망설일 틈도 없이, 리나는 통로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서늘한 공기가 그녀의 피부를 감쌌고, 흙냄새와 함께 미세한 전기적 향이 섞여 있었다. 통로의 끝에는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고대 유적이라기보다는 첨단 과학 시설에 가까웠다. 한가운데에는 유리관에 둘러싸인 거대한 장치가 우뚝 솟아 있었고, 푸른빛은 바로 그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장치의 표면에는 수많은 고대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기호들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잊어버린 언어의 일부인 것처럼.

유리관에 다가가자, 장치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수십 개의 목소리가 겹쳐진 속삭임 같았다. 그리고 그 속삭임 속에서 그녀의 꿈속에 등장했던 아이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동시에 잊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폭풍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덮쳐왔다.

잊혀진 서약

빛, 너무나도 강렬한 빛이었다. 눈부신 섬광 속에서 한 여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그녀는 리나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약속해줘… 이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제발…” 여인의 목소리는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리나의 심장을 찢어놓는 듯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 바로 이 펜던트였다. 여인은 펜던트를 아이의 작은 목에 걸어주며 속삭였다. “기억해. 네가 누군지, 그리고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언젠가 이 펜던트가 너를 인도할 거야.”

기억의 홍수가 멈추자, 리나는 비틀거리며 장치에 몸을 기댔다.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밀려오는 사무치는 슬픔이 그녀를 덮쳤다. 눈앞의 여인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렇다면 그녀가 찾아 헤매던 그 ‘존재’는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의 과거였다는 말인가? 그녀가 시간 여행자가 아니라, 시간 여행자의 딸이었단 말인가? 그녀가 잃어버린 기억은, 그녀의 정체성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적인 진실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딸로서 시간을 건너왔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이 펜던트를 주며 어떤 임무를 맡겼던 것이었다.

그때, 장치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더 선명하고 단호한 어조였다.

“수신자, 리나. 당신의 기억 복구가 50%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리나는 숨을 헐떡이며 장치를 올려다봤다. 50%? 아직 절반도 모른다는 말인가? 그보다 더한 진실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선택하세요. 잃어버린 과거의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인지, 혹은 당신이 현재까지 쌓아온 삶을 지켜낼 것인지. 모든 기억을 되찾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현재의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과거의 그림자에 먹히거나, 혹은… 과거를 파괴해야 할 것입니다.”

장치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그 메시지는 리나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과거의 그림자에 먹히거나, 과거를 파괴해야 한다니? 그녀가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토록 잔혹한 딜레마를 안겨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그 대가가 너무나도 컸다. 그녀가 지금껏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추억, 그녀가 쌓아 올린 작은 희망들… 그것들을 모두 잃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때, 뒤에서 섬광이 터지며 통로 입구가 완전히 파괴되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먼지구름 사이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나! 드디어 찾아냈군. 그 망할 장치를 가동시키다니! 순진한 녀석.”

그녀의 뒤를 돌아보자,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 ‘렉스’가 서 있었다. 그의 눈은 광기로 번득였고, 손에는 미래형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는 리나가 과거를 찾지 못하도록 방해해왔던 장본인이었다. 렉스는 리나의 주변을 둘러싼 장치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멈춰!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리나가 소리쳤다.

렉스는 비웃듯이 말했다. “네 어머니가 저지른 짓을 끝내려는 거다. 모든 것을 되돌릴 순 없지만, 적어도 너만은 내 손에 넣을 수 있어. 네 안에는 우리가 찾던 열쇠가 있으니까!”

장치는 계속해서 미약하게 푸른빛을 내뿜으며 속삭였다. “선택하세요, 리나. 시간이 없습니다.”

렉스의 무기에서 푸른 섬광이 일기 시작했다. 장치를 파괴하려는 듯했다. 리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모든 기억을 되찾고 과거의 그림자와 싸울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인가. 그리고 지금, 그녀를 위협하는 렉스로부터 자신을, 그리고 어쩌면 이 거대한 장치에 갇힌 미지의 진실을 지켜내야 했다. 그녀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펜던트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과연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