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한 식사, 뜻밖의 손님
지아는 퇴근 후의 고요한 저녁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낡았지만 아늑한 스튜디오 아파트, 창밖으로 번지는 도시의 불빛, 그리고 갓 끓인 인스턴트 미역국에서 피어오르는 김. 하루 종일 복잡한 도면과 씨름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던 시간들이 따뜻한 국물 한 숟갈에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아, 이게 바로 낙이지.”
작게 중얼거리며 밥을 크게 한 술 떴다. 톡톡 터지는 쌀알의 식감이 좋았다. 오늘따라 유독 피곤했으니, 일찍 씻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식탁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리모컨이 ‘스윽’ 하고 1센티미터쯤 옆으로 움직였다.
지아는 젓가락을 든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착각일까?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뭘 본 거지?” 피곤하면 이런 일도 있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쓰러질 듯 졸린 몸이었다.
다시 식사에 집중하려는데, 이번에는 숟가락 옆에 놓아둔 냅킨 한 장이 살랑, 하고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였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환풍기도 꺼져 있었다. 에어컨도 작동하지 않았다.
“뭐야, 왜 떨어져?”
고개를 숙여 냅킨을 주우려던 지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주방 카운터 위에 놓여 있던 유리컵 하나가, 제 스스로 움직여 카운터 모서리 쪽으로 천천히 밀려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건… 착각일 리 없었다. 컵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움직였고, 곧 카운터 끝에 도달하더니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아는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겨우 틀어막았다. 몸은 이미 식탁 의자 뒤로 바싹 붙어버렸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평화로웠던 공간이, 한순간에 기묘한 미스터리의 장으로 변해 있었다.
지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꿈일까? 혹시 내가 너무 피곤해서 환각이라도 보는 걸까? 아니, 유리가 깨진 소리는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파편들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할까? 친구? 경찰? 아니, 누가 이런 이야기를 믿어줄까. “유리컵이 저절로 움직여서 깨졌어요!”라고 말하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 게 분명했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주방을 노려봤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적막만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구… 있어…?”
목소리가 잔뜩 쉬어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후, 지아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밑에 유리 조각들이 밟힐까 봐 조심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손전등을 켜고 구석구석 살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침입자의 흔적도, 이상한 장치도 없었다.
“내가… 미쳤나 봐.”
자조 섞인 혼잣말이 터져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심장이 여전히 발광하듯 뛰어댔다.
그녀는 유리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그리고 다시 식탁에 앉았다. 따뜻했던 미역국은 이미 식어버렸고, 밥알은 불어 터져 있었다. 입맛이 싹 달아났다.
그때, 식탁 건너편에 놓아둔 그녀의 다이어리가 갑자기 펼쳐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방금 전까지 닫혀 있던 다이어리가, 마치 누군가가 펼쳐든 것처럼.
지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깨지지도 않았다. 그저, 다이어리 페이지 하나가 얌전히 펼쳐진 채였다.
그녀는 천천히 다이어리에 시선을 옮겼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어제 저녁에 그녀가 끄적인 낙서가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번 주말엔 쉬자! 제발 쉬자!’라고 쓰여 있었다.
그 순간, 지아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공포보다는… 뭐랄까, 마치 누군가 자신의 옆에 앉아 이 낙서를 함께 읽고 있는 듯한, 기묘한 친밀감 같은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등골이 오싹했지만, 처음의 그 맹목적인 공포와는 달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기묘하고도 조용한 속삭임이었다.
“너도… 쉬고 싶니…?”
지아는 작게 속삭였다. 식탁 위는 여전히 고요했고, 깨진 유리컵의 흔적만이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도시의 밤은 길고, 그녀의 아파트에는 이제, 조용한 손님 하나가 더 생긴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