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
민아는 거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희미한 텔레비전 빛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안식처처럼 깜빡였다. 채널은 그저 배경 소음을 제공하는 용도였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 신경은 얇은 벽 너머, 어쩌면 바닥 아래, 혹은 천장 위 어딘가에 박혀 있었다.
시작은 사소했다.
어젯밤엔 분명 현관문을 꽉 잠갔는데, 아침에 나가보니 잠금장치가 살짝 열려 있었다. 며칠 전에는 화장실 수건이 저절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오래된 아파트니까. 어딘가 삐걱거리고 흔들릴 수도 있지. 합리화는 쉬웠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방금 전,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컵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분명히. 민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진 유리 파편을 치웠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이제 더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의 침묵은 숨통을 조여오는 듯했다. 텔레비전 속 인물들의 웃음소리가 기이하게 멀게 느껴졌다. 이 넓은 거실에 그녀 혼자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아무것도 없어.”
민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되뇌는 주문인지 알 수 없었다. 침착하려고 애썼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그때였다.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민아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텔레비전 볼륨을 최대로 키우고도 그 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그건 컵이 떨어지는 소리도 아니었고,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낡은 서랍이 억지로 열리는 듯한, 둔탁하고 거친 소리였다.
민아는 숨을 참고 주방 쪽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싱크대 상부장의 문이 아주 천천히, 삐걱거리며 열리고 있었다. 손잡이가 스스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문짝의 가장자리를 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미세한 진동과 함께 서서히.
민아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믿을 수 없었다. 눈앞의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상부장 문은 완전히 열리더니, 이내 다시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짧은 순간, 문 안쪽의 접시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이 보였다.
정말이었다. 누군가 저 문을 열고 닫은 것이었다.
민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손발이 차가웠다.
“누구… 누구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주어 외쳤다. 적막이 답했다. 오직 텔레비전의 시끄러운 소리만이 그녀의 목소리를 삼키는 듯했다.
민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이 아파트를 벗어나고 싶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망상일까? 극도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빚어낸 환각일까?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거실 창문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아는 몸을 돌렸다. 베란다 통유리창이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소리는 분명했다. 뭔가 창문을 건드린 소리.
그녀는 공포에 질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두껍고 견고한 베란다 통유리창의 한가운데서, 마치 누군가 안쪽에서 뾰족한 것으로 세게 내리친 것처럼, ‘쩌어억’ 소리와 함께 선명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점 하나에서 시작된 균열은 거미줄처럼 빠르게 뻗어 나갔다. 마치 유리가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창문은 부서지지 않았다. 다만, 내외부의 충격 없이 스스로 금이 가는 모습은 어떤 공포 영화보다 현실적이고 섬뜩했다.
유리창이 균열을 멈춘 곳은 정확히 민아의 눈높이였다. 그 금 간 유리 사이로,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보이지 않는 눈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민아는 얼어붙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아파트에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실의 모든 불이 동시에 꺼졌다.
텔레비전 화면마저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암전됐다.
완벽한 어둠.
완벽한 침묵.
그리고, 심장을 파고드는 차가운 존재감.
민아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흐느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