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균열 (상)**
강민준은 지친 몸을 이끌고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었다. 삭막한 도시의 소음은 철문 너머로 멀어지고, 비로소 찾아온 고요함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하루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듯했다. 삐걱거리는 소리 한 번 없이 부드럽게 닫힌 문은 그를 완벽하게 차단된 자신만의 공간으로 안내했다. 어두컴컴한 거실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익숙한 공간 특유의 안정감은 그에게 늘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늘 그렇듯,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과 지갑,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열쇠를 거실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듯 놓았다. 대충 식사를 해결하고 샤워를 한 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눕히면 그제야 진정한 휴식이 시작될 터였다. 민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협탁 위, 방금 전 자신이 놓았다고 확신하는 물건들이 보이지 않았다. 스마트폰도, 지갑도, 열쇠 꾸러미도 없었다. 민준은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했다. 혹시 피곤해서 잘못 봤나? 그는 방금 들어섰던 현관 쪽을 힐끗 바라봤다. 어두워서 제대로 놓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젠장, 벌써 이렇게 건망증이 심해졌나.”
낮게 중얼거리며 민준은 다시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어라? 신발장 옆 작은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자신의 물건들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정리해 둔 것처럼.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게까지 엉뚱한 곳에 물건을 놓을 리가 없는데. 게다가 저렇게 ‘가지런히’ 둘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피곤해서 생긴 착각이거나, 무의식이 만들어낸 기행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물건들을 다시 집어 협탁 위로 옮겼다.
밤은 깊어지고, 민준은 침대 위에서 노트북으로 가벼운 영화를 보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캔맥주를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거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옆집이겠지. 늦은 밤에 뭘 저렇게 떨어뜨려? 그는 다시 영화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잠시 후, 또 다시 쿵!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가까운 소리였다. 마치 자신의 거실에서 나는 소리처럼.
불길한 예감에 민준은 노트북을 닫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두운 거실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거실의 스탠드 불을 켜자, 그의 시선은 곧장 소리가 났던 곳으로 향했다. 책장 옆, 늘 민준의 손이 닿는 곳에 꽂혀있던 두꺼운 양장본 소설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게 왜…”
민준은 책을 주워 들었다. 똑바로 꽂혀있던 책이 저절로 떨어질 리는 만무했다. 지진이라도 났나 싶어 핸드폰으로 뉴스 앱을 확인했지만, 지진 속보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고, 왠지 모를 서늘함에 팔짱을 끼었다. 집이 오래돼서 그런가? 아니, 이 아파트는 지은 지 5년도 안 된 새 아파트였다. 게다가 책장이 흔들릴 정도의 소리도 아니었고.
‘피곤해서 헛것이 들린 건가? 아니면 예민해진 건가.’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 애써 불안감을 잠재웠다. 그는 모든 불을 끄고 침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한 번 생긴 불길한 의심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괜스레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민준은 결국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 민준은 몽롱한 정신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거실로 나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냈다. 그런데 싱크대 위에 놓여있던 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이런 젠장!”
어제보다 훨씬 명백한 현상이었다. 그는 순간 굳어버렸다. 어젯밤에 혹시 술에 취해 컵을 떨어뜨리고 기억을 못 하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리가 없었다. 컵은 분명 싱크대 선반 위에 깨끗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깨진 유리 조각들을 치웠다. 설거지를 하려 물을 틀었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마찬가지였다.
“고장났나? 어제는 멀쩡했는데.”
그는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전화기가 꺼져있는 듯한 기계음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답답함과 함께 묘한 소외감이 그를 덮쳤다. 이 넓은 아파트에 자신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민준은 왠지 모를 오싹함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파트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거실의 전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두 번 깜빡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디스코장처럼 빠르게 명멸했다.
“뭐야, 이건 또!”
민준은 스위치에 손을 뻗어 몇 번 눌러보았다. 하지만 전등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현상이 단순한 우연이나 피로 때문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때였다.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아주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처럼 불분명했지만, 분명히 ‘소리’였다.
“……나가…”
“…….안 돼…”
소름이 돋았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쭉 훑고 지나가는 느낌. 민준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이 아파트에는 민준 혼자 살고 있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그는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거실 전등의 깜빡임이 더욱 격렬해질 뿐이었다. 거실 한복판에 놓인 소파가 스르륵, 하고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민준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 환각인가?
아니, 분명히 움직였다. 소파는 마치 누군가 뒤에서 살짝 밀어낸 것처럼, 원래 있던 자리에서 10센티미터쯤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쿵! 쿵! 쿵!
이번에는 안방에서 규칙적인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둔탁한 소리. 민준은 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이 모든 현상을 합리화할 수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상식적인 일들.
그는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었다. 어둠 속, 침대 위 이불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꿀렁거리고 있었다. 어둠은 더욱 짙어져, 마치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숨이 막혔다. 공기가 끈적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침대 옆 작은 협탁 위에 놓여있던 액자가 휙, 하고 날아와 민준의 뺨을 스쳤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피부를 긁고 지나가며 따끔한 통증을 남겼다. 민준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차마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두려움이 그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액자가 떨어진 곳을 보니, 벽면에 박혀있던 못이 빠져나와 공중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뽑아낸 것처럼.
“제발… 제발…”
민준은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저절로 움직이는 물건, 알 수 없는 속삭임,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향한 물리적인 공격까지. 그는 공포에 질려 현관문으로 향했다. 당장 이 집을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현관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문이 안쪽에서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그를 가두려는 듯이. 철컥, 하는 잠금장치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문은 잠겨버렸다.
민준은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비틀고 문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는 다시 그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또렷했다.
“돌아와… 돌아와야 해…”
돌아오라고? 어디로?
그때였다. 그의 눈앞에서 거실 벽면이 마치 얇은 막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벽지 패턴이 뭉개지고, 시멘트 벽 안쪽의 콘크리트가 마치 물처럼 출렁였다. 벽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의 눈은 거실 한가운데, 그 벽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소용돌이에 고정되었다. 그곳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뼈마디가 굵고, 검푸른 핏줄이 선명한,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손이.
그 손은 민준을 향해 뻗어왔다.
“으아아악!”
민준은 비명을 질렀다. 그 손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차갑고 단단한, 그러나 동시에 끈적하고 눅눅한 감촉. 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이미 몸은 균형을 잃고 어둠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시야가 일그러지고, 모든 소리가 뒤섞였다. 아파트의 모습이 녹아내리는 듯한 환상과 함께, 그는 알 수 없는 공간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현대 도시의 아파트, 강민준의 집은 이제 텅 비었다. 하지만 거실 벽면에 남겨진 미세한 균열은, 방금 전 일어났던 참극의 유일한 증거처럼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너머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의 서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