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핏빛 여명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탄광촌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먼지 섞인 바람이 뼈까지 시리게 파고드는 이른 새벽, 낡은 나무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도진은 익숙하게 어깨에 멘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눈빛은 굳어 있었다. 피로와 분노, 그리고 희미한 희망이 뒤섞인 그런 빛이었다.
마을은 아직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의 시선 끝에, 크레토스 제국의 감시탑이 거대한 흉터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탑의 꼭대기에 걸린 붉은 깃발은 마치 피를 토한 듯 펄럭였다. 저 깃발 아래서, 수많은 평민들이 숨죽이며 살아가야 했다.
“젠장.”
낮게 읊조린 욕설은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그가 향하는 곳은 마을 외곽에 자리한, 이 땅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구덩이, ‘어둠의 심연’이라는 이름의 던전이었다. 제국은 그 심연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나석과 희귀 광물을 수탈해갔고, 그 대가로 마을에는 굶주림과 병고만 남겼다.
미나의 잦은 기침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누이의 병을 고치려면 던전 깊숙이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생명의 광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생명의 광석은 제국군이 탐색을 엄금하는 구역에 있었다. 게다가 새벽 연합의 새로운 계획에 필요한 ‘암영 결정’ 역시 어둠의 심연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두 가지 목표, 하나의 여정. 도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더러운 제국의 목줄을 죄기 위해, 그리고 그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던전 입구는 거대한 바위들이 엉성하게 쌓인 동굴이었다.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곰팡이 핀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도진은 허리춤에 찬 낡은 마력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마력등의 희미한 불빛은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간신히 비췄다. 벽에는 기묘한 문양의 이끼들이 들러붙어 있었고, 천장에서는 끈적한 물방울이 간헐적으로 떨어졌다.
“이런 썩어빠진 곳.”
발밑에서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진은 순간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낡은 단검을 뽑아들고 자세를 낮췄다. 경험으로 단련된 그의 감각이 위험을 경고했다. 어둠 속에서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곧이어 불빛에 드러난 것은 거대한 독거미 한 마리였다. 성인 남자의 머리통만 한 몸통에 털이 보송하게 돋아난 다리 여덟 개가 꿈틀거렸다. 독거미는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도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던전 탐색에서 얻은 경험이었다. 그는 독거미의 움직임을 읽고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거미의 날카로운 앞다리가 허공을 갈랐다. 도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검을 휘둘러 거미의 약점인 배 아랫부분을 찔렀다. 끈적한 체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독거미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쳇, 끈질긴 놈.”
도진은 단검에 묻은 체액을 닦아내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의 목표는 더 깊은 곳이었다.
몇 개의 갈림길을 지나 던전의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습기는 더욱 짙어졌고, 기온은 점점 낮아졌다. 간간이 들려오는 기괴한 괴물들의 울음소리는 신경을 긁었다. 도진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제국군이 통제하는 구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통 평민 탐색꾼들이 접근할 수 없는 심연의 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딘가 이상했다. 미약하게나마 마력등으로는 비추기 힘든 곳에서 인공적인 불빛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뭐지?”
직감적으로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빛이 새어 나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좁은 균열을 통과하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지하 동굴. 그리고 그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광맥. 그것은 단순한 광맥이 아니었다. 푸른빛을 발하는 ‘마력 증폭 결정’들이 거대한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수많은 인부들이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낡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으며, 채찍을 든 제국 병사들의 감시 아래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강제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도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국은 이 심연 깊숙한 곳에서 비밀리에 거대한 마력 증폭 결정을 채굴하고 있었다. 그것도 평민들을 강제 징용하여. 이 결정들은 마법 병기나 마도사의 힘을 증폭시키는 데 사용되는 귀중한 전략 자원이었다. 만약 이 정도 규모의 결정들이 제국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새벽 연합의 모든 저항은 무의미해질 터였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인부가 쓰러졌다. 옆에 있던 병사가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도진의 심장이 분노로 쿵쾅거렸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괴물보다 더한 괴물들이었다.
도진은 숨을 죽이고 상황을 파악했다. 저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이 정보를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다. 새벽 연합에 반드시 알려야 할 내용이었다. 그는 주변의 마력 증폭 결정 하나를 몰래 떼어내기로 결심했다. 이 결정 자체가 엄청난 증거가 될 터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려는 순간, 발밑에서 돌멩이가 데구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누구냐!”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주변을 감시하던 병사 하나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지만, 이미 늦었다. 몇몇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그가 숨은 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젠장, 들켰군.”
도진은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혀야 했다. 그는 재빨리 근처의 마력 증폭 결정 줄기에서 가장 작은 조각 하나를 떼어내 허리춤에 감췄다.
“이 반란군의 개자식!”
병사 한 명이 돌벽 뒤에서 튀어나왔다. 도진은 몸을 날려 병사의 공격을 피하고, 놈의 목에 단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는 고꾸라졌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이 순식간에 그를 포위했다.
세 명의 병사. 창과 검으로 무장한 그들은 숙련된 전사들이었다. 도진은 불리한 상황임을 알았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미나와 새벽 연합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죽어라!”
세 명의 병사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도진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며 몸을 회전시켰다. 창날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고통을 참으며 팔을 뻗어 한 병사의 칼을 쳐내고, 다른 손으로는 단검을 휘둘러 또 다른 병사의 다리를 베었다. 병사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였다. 뒤에서 달려든 병사가 휘두른 검이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으득,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통증이 전신을 꿰뚫었다.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도진은 고통에 신음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남은 한 병사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도진은 간신히 피했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죽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동굴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거대한 종유석이었다.
도진은 망설임 없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주워 던졌다. 그의 정확한 투척이 종유석을 지지하는 약한 부분을 강타했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종유석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는 순간, 도진은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려 균열 너머의 좁은 통로로 도망쳤다. 거대한 종유석이 무너지며 채굴장에 흙먼지와 함께 바위를 쏟아냈다.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도진은 피 묻은 어깨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어둠의 심연은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는 듯했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마력 증폭 결정 조각은 뜨겁게 달아올라 마치 그의 심장처럼 격렬하게 박동하는 듯했다.
마침내 던전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이미 동쪽 하늘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은 여명이었다. 도진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어깨의 상처는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손안의 마력 증폭 결정 조각을 꽉 쥐었다. 이 작은 조각이, 이 거대한 제국의 목줄을 죄는 데 필요한 중요한 열쇠가 될 터였다.
“새벽이 온다…”
도진은 낮게 읊조렸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피 묻은 뺨을 스쳤다.
“그리고 우리는 저들을 부술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새벽은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벽은 제국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