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황무지 위에 굳건히 서 있던 태양마저 기진맥진한 듯 서쪽 하늘로 고개를 떨구는 시간이었다. 붉은 노을이 콘크리트 잔해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닳고 닳은 강민의 전투화가 그 그림자를 밟으며 묵묵히 전진했다. 사방을 뒤덮은 잿빛 먼지가 숨을 턱턱 막히게 했지만, 그는 이미 익숙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깊숙이 파고드는 쇠 비린내와 곰팡이 냄새마저 고향 같았다.
며칠째였을까. 식량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고, 물통 안에는 손바닥만 한 흙탕물만 고여 있었다. 등 뒤로 메고 있는 낡은 배낭은 무게가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건 보급품의 부족이 아니라 고독과 절망이었다.
“에이온 제약 연구소라….”
강민은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폐허가 된 도시 외곽에 덩그러니 남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저곳에 아직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의약품이나 연구 자료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왔다. 헛된 희망일 가능성이 컸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건물을 올려다봤다. 외벽은 검게 그을리고 여기저기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멀쩡해 보였다. 멀쩡하다는 것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완벽하게 파괴되지 않은 건물은 대개 가장 위험한 것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강민은 주위를 한 바싹 살폈다. 부서진 아스팔트 위에는 녹슨 차량들이 뒤집혀 있고, 유리 파편들이 별빛처럼 흩어져 있었다. 바람 소리마저 음산하게 귓가를 스쳤다. 적막. 압도적인 침묵. 그것이 이 세상의 가장 흔한 풍경이었다. 그는 총을 고쳐 잡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입구를 막고 있던 엉성한 바리케이드를 치우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확 끼쳐왔다. 내부 역시 어둠과 정적이 지배했다. 그의 손전등 불빛이 복도를 따라 흔들리며 벽면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를 춤추게 했다. 부서진 의자와 책상, 깨진 유리 파편들. 약탈자들이 휩쓸고 간 흔적이 역력했다.
“이봐, 아무도 없나?”
그는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메아리도 없이 음산하게 울리다 사라지는 목소리는 그의 고독을 더욱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의학품 보관소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이동했다. 층계참을 오르자, 갈라진 벽 틈새로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3층, 의료 연구동.’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희망과 함께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여기까지 약탈자들이 들이닥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어쩌면 더 위험한 것이 이 복도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걸고 여기까지 왔다.
복도는 길고 굽이쳤다. 찌그러진 실험 도구들, 뒤섞인 문서 뭉치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희망이 점점 사그라드는 순간, 그의 발길이 한 방 앞에서 멈췄다. 다른 문들과는 다르게 두꺼운 강철 문이었다. 게다가 문 위에는 ‘제1보안창고’라는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애써 가려놓은 듯, 넝마 조각으로 덧대어 놓은 자국도 보였다. 약탈자들이 급하게 훑고 지나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했지만 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강민은 배낭에서 공구 세트를 꺼냈다. 낡고 녹슨 자물쇠였지만, 침착하게 해체하기 시작했다. 딸깍, 덜그럭. 오랜 시간 끝에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순간,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먼지와 함께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묘한 시큼한 약품 냄새였다. 강민은 손전등을 비췄다. 좁은 방 안에는 강철 선반들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비어 있었지만, 한쪽 구석에 놓인 상자 하나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응급 의약품 세트.’
녹슬지 않은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상자였다. 강민은 다급하게 다가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놀라웠다. 항생제, 소독약, 진통제, 붕대, 심지어 몇 개의 비상식량까지!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 정도면 며칠은 더 버틸 수 있다. 어쩌면 생존자 집단에 도달할 때까지 버틸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서둘러 내용물을 배낭에 챙기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흔들리던 손이 진정될 틈도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르르…
낮고 굵은 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강민의 몸이 순간 굳었다.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싹함. 그것은 문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손전등 불빛이 상자 뒤편, 굳게 닫힌 환풍구 틈새를 비췄다. 검은 그림자. 그리고… 붉게 빛나는 두 개의 점.
끼이이익!
쇠를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환풍구 덮개가 찢겨 나가듯 떨어져 나갔다. 끔찍한 형체의 ‘기형체’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불균형하게 비틀린 사지와 부풀어 오른 머리,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 그로테스크한 생김새는 혐오감을 넘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놈의 입에서는 끈적한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민은 본능적으로 총을 겨눴다.
탕!
섬광과 함께 총성이 좁은 방을 뒤흔들었다. 기형체가 움찔했지만, 그로테스크한 몸뚱이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한 듯 더욱 빠르게 강민에게 달려들었다. 강민은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놈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팔뚝을 스쳤다. 뜨거운 통증과 함께 살점이 찢어지는 감각.
“젠장!”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한 발 더 발사했지만, 놈은 이미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강민은 총을 던지고 허리춤에 찬 생존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방어는 무의미했다. 오직 공격만이 살길이었다. 그는 선반 위로 뛰어올라 기형체의 머리를 향해 나이프를 내리찍었다. 끈적한 체액이 터져 나오며 놈이 비틀거렸다.
크르르르… 으르르르…
하지만 그때, 환풍구 틈새에서 또 다른 소리들이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이곳은 놈들의 둥지였다. 강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다친 팔을 부여잡고 비상식량 몇 개와 약품이 든 배낭을 움켜쥐었다.
“이 빌어먹을…”
살아야 한다. 그는 허둥지둥 문을 박차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기형체들의 괴성. 놈들이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발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들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강민은 계단을 굴러 떨어지듯 내려갔다. 부서진 난간을 넘어 비상구 문을 향해 달렸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탈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쾅!
그가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는 해가 마지막 빛을 토해내며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강민의 눈이 공포로 크게 뜨였다. 저 멀리, 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형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놈들이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 섬뜩한 움직임. 그것은 분명 그가 방금 마주했던 기형체들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 마리쯤 될까?
강민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방금 작은 둥지에서 벗어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이 모든 폐허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재앙이었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배낭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