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다. 도시는 불빛으로 번쩍였지만, 그 빛은 이 낡은 골목에는 닿지 못했다. 지혜는 허물어져 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심장이 귀청이 찢어질 듯 울리는 것을 느꼈다. 빗물 섞인 차가운 바람이 코트 속으로 스며들어 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추위는 지금 그녀를 짓누르는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귓가에 맴도는 것은 한 시간 전, 숨죽인 채 들었던 그의 경고였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예상보다 빨라. 오늘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고요했지만, 그 속에 담긴 긴장감은 칼날 같았다. 하지만 지혜는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곳으로 왔다. 하루라도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 금지된 사랑은 그녀의 삶 전체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바보 같은 짓인 거 알아….”
지혜는 제 입술을 짓씹었다. 벽돌 사이 틈으로 자란 잡초들이 스산한 바람에 흔들렸다. 그 모습이 마치 위태롭게 흔들리는 자신들의 관계 같았다. 인간과… 그림자 부족의 후예. 그의 종족은 수천 년간 인간의 눈을 피해 밤의 장막 아래 숨어 살아왔다. 이 도심 한복판에 그들의 감춰진 영역이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스르륵.**
발밑에서 얇은 비닐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지혜의 몸이 본능적으로 굳어졌다. 심장이 다시 한번 거세게 울렸다. 어둠 속, 그녀의 시선이 날카롭게 한 곳에 박혔다. 골목 끝, 깊은 그림자가 짙게 깔린 곳. 분명 방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쿵, 쿵.**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낡은 벽돌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냄새, 희미한 흙냄새와 함께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금속성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그의 냄새가 아니었다. 낯설고 위협적인 냄새.
그때, 그림자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지혜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삼켰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의 근육이 돌처럼 굳었다. 붉은 눈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렬했고, 그 빛은 마치 밤을 찢고 나오는 맹수의 눈 같았다.
그림자 속 존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인간의 형상이었지만, 그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웠다. 어둠이 그를 휘감고 있었고, 그 어둠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났다. 차갑고 잔인한 미소. 그리고 지혜는 그 순간 깨달았다. 그는 ‘그들’이었다. 카인과 같은 종족이지만, 카인과는 다른, 그들의 금기를 찢어버릴 존재를 추적하는 ‘심판자’들 중 하나.
“찾았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어떠한 인간적인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사냥꾼의 냉혹함만이 가득했다.
지혜는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부림치려 했지만, 이미 다리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눈의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인간의 피는… 역겹군.”
그는 코웃음을 쳤다. “종족의 율법을 어기고, 감히 저열한 인간과 섞였단 말이냐.”
그의 손이 어둠 속에서 뻗어 나왔다. 날카로운 손톱이 달빛에 섬뜩하게 빛났다. 지혜는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아앙!**
섬광과 함께 굉음이 골목을 뒤흔들었다. 붉은 눈의 그림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진한 어둠이 흩뿌려지고, 벽에는 깊은 금이 갔다.
지혜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 선 것은 카인이었다.
언제나처럼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그의 주변에서는 격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밤하늘처럼 깊었지만, 지금은 그 속에 맹렬한 불꽃이 이글거렸다. 분노. 순수한 분노.
“카인….”
지혜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간신히 흘러나왔다.
카인은 대답 없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용솟음쳤고,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골목 끝으로 튕겨 나간 심판자를 향해 뻗어 나갔다. 심판자는 벽에 처박힌 채 겨우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콰직!**
검은 촉수가 심판자의 몸을 휘감았다. 심판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네 이놈! 율법을 어긴 것도 모자라 동족에게 칼을 겨누다니!”
그는 발버둥 쳤지만, 카인의 어둠은 더욱 강렬하게 그를 조여왔다.
카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 경고를 무시하고 감히 이곳에 발을 들였더냐. 그리고… 내 것을 탐냈어.”
그의 시선이 지혜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은 여전히 분노로 이글거렸지만, 그 속에는 지혜를 향한 깊은 염려와 사랑이 담겨 있었다.
“지혜, 괜찮아?”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몸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카인은 그녀의 상태를 한눈에 파악하고는, 잡혀있는 심판자를 향해 더욱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이곳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의 눈이 너무 많아. 당장 사라져.”
카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위협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심판자는 카인의 어둠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놈. 네놈의 어리석음이 결국 종족 전체를 위협할 것이다. 감히 저 하찮은 인간을 위해…!”
**쿠우우웅!**
카인의 주먹이 심판자의 면전에 꽂혔다. 벽이 흔들리고 먼지가 솟구쳤다. 심판자는 다시 한번 벽에 깊숙이 처박혔다.
“한 번만 더 그녀를 모욕하면… 그때는 내가 직접 네 목을 부러뜨릴 것이다.”
카인의 눈은 살기로 빛났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어둠의 기운이 더욱 맹렬하게 심판자를 휘감았다. 심판자의 몸이 마치 녹아내리는 것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카인! 그만… 너무 위험해!”
지혜가 간신히 소리쳤다.
이대로라면 심판자가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율법을 어긴 자를 추적하는 심판자라 해도, 동족을 살해하는 것은 카인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그들의 종족 사회는 이미 분열 직전이었다.
카인은 지혜의 외침에 잠시 멈칫했다. 그의 맹렬했던 눈빛이 흔들렸다.
그 틈을 타, 심판자는 온몸을 비틀어 검은 촉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그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겨우 벗어나는가 싶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카인은 분노를 삭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던 어둠의 기운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는 이내 돌아서서 지혜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이 지혜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 지혜는 따스함을 느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카인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는 지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지혜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단단한 품은 언제나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보고 싶었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카인은 지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아까의 소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카인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들이 우리가 만나는 곳을 알았어. 이제 너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어.”
지혜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눈물로 가득했지만, 그 속에는 두려움보다 더 강렬한 감정이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 헤어져야 해?”
그녀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카인은 말없이 지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갈등과 번민이 소용돌이쳤다.
“아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헤어지지 않아.”
그는 지혜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아귀에선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우리가 도망치면 돼.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어.”
그의 눈빛은 결연했다. 이 도시, 이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지혜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감과 동시에 묘한 희망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그녀의 질문에 카인은 대답 대신 그녀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골목 입구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멀리서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듯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 번개처럼 빠르게 다가오는 또 다른 그림자들이 있었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셋, 아니 넷… 붉은 눈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카인!”
지혜의 비명 소리가 골목을 찢었다.
그들의 도피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벗어날 수 있을까?
밤은 아직 깊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