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먼지가 바람에 실려 춤추는 도시. 한때는 화려했을 고층 빌딩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비틀린 철골들이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늑골처럼 앙상했고, 그 사이로 자라난 이름 모를 덩굴 식물들이 빌딩의 시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은 갈라지고 부서져, 그 틈으로 검붉은 이끼와 끈적한 균사체들이 기생하며 도시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하진은 낡은 방독면 아래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등에 멘 낡은 배낭은 텅 비다시피 했고, 손에 쥔 강화된 지렛대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며칠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목구멍은 사막처럼 바싹 마르고, 찢어진 장갑 사이로 드러난 손등은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솟아 있었다. 살기 위해선 뭐든 찾아야 했다. 썩지 않은 통조림 하나, 오염되지 않은 생수 한 병이라도.
“젠장… 이대로 가다간 말라죽겠군.”
그의 눈은 흐릿한 방독면 너머로 폐허의 풍경을 훑었다. 이곳은 한때 상업 지구였을 것이다. 유리창이 깨진 상점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도시의 망령이 흐느끼는 것 같았다.
갑자기, 하진의 등골이 오싹하게 굳었다. 털끝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듯한 기분. 단순한 위험 감지가 아니었다. 피부 아래로 느껴지는 싸늘한 파장. 공기 중에 떠도는 듯한 미약한 ‘뒤틀린 기운’. 그의 고유한 감각, 세상이 무너진 이후 얻게 된 ‘감응’ 능력이 반응하고 있었다.
“가까이에… 뭔가 있어.”
그는 지렛대를 고쳐 쥐고 발걸음을 멈췄다. 감응은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자, 동시에 그를 극한의 공포로 몰아넣는 존재였다. 뒤틀린 기운이 강할수록, 그곳에 도사린 존재는 더욱 위험했다.
기운의 원천은 바로 앞에 보이는 낡은 편의점 건물이었다. 유리창은 이미 박살 나 있었고, 출입문은 뜯겨 나간 채 흉측한 어둠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반적인 폐허라면 망설임 없이 들어갔겠지만, 이곳은 달랐다. 죽은 듯 고요한 어둠 속에서, 뒤틀린 기운은 명확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식량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식량에 대한 갈망이 공포를 집어삼켰다. 그는 조심스럽게 편의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파편과 썩은 상품들이 뒤섞여 있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썩어가는 단내가 코를 찔렀다. 선반들은 쓰러지거나 텅 비어 있었고, 유일하게 온전한 것은 계산대 뒤편에 박혀 있는 작은 냉장고뿐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기적처럼, 오염되지 않은 생수 몇 병과 통조림 몇 개가 남아 있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천운이었다.
그가 냉장고 문을 열려는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감응이 폭발적으로 경고음을 울렸다.
“크악!”
하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등 뒤를 스친 것은 날카로운 발톱이 아니었다. 그림자, 그 자체였다. 벽에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가 갑자기 찢어지듯 솟아오르더니, 길고 끈적한 촉수처럼 변해 그를 휘감으려 한 것이다.
그림자… 아니, ‘잔영수(殘影獸)’였다. 도시의 뒤틀린 에너지가 형상화된 존재. 그것은 빛을 싫어하고, 실체가 없으면서도 생명체의 기운을 빨아먹는 끔찍한 존재였다.
잔영수는 하진이 피한 곳으로 다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마치 바닥과 벽을 기어 다니는 살아있는 먹물 같았다. 그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네놈… 식량을 노리고 있었군.”
하진은 냉장고 문을 닫고, 지렛대를 휘둘렀다. 쩌억! 지렛대 끝이 그림자를 강타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림자는 출렁이며 벽으로 스며들었다가, 다른 쪽 벽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잔영수는 빛이 희미한 편의점 안에서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자유로웠다. 그것은 하진의 주변을 맴돌며, 그의 그림자를 향해 촉수를 뻗었다. 잔영수가 그림자를 건드리는 순간, 몸이 마비되는 듯한 극심한 피로감에 휩싸였다. 에너지 흡수.
하진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그림자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곳, 즉 벽에 바싹 붙어 섰다. 그러나 잔영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천장으로 기어 올라가더니, 그 위에서 그의 그림자를 향해 덮쳐들었다.
“젠장, 놔둬라!”
그는 지렛대를 있는 힘껏 휘둘러 천장의 그림자를 쳤다. 이번엔 달랐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일부가 찢어지는 듯하더니, 검은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약점인가? 뒤틀린 기운이 집중된 곳!’
하진의 감응이 미약하게나마 잔영수의 ‘핵’이 되는 부분을 감지했다. 그것은 그림자 덩어리 속에 희미하게 빛나는, 손톱만 한 검은 핵이었다. 일반적인 시력으로는 보이지 않는, 오직 감응으로만 느낄 수 있는 존재.
잔영수는 찢어진 부분에서 마치 피를 흘리듯 검은 액체를 흘리며 고통스러운 파장을 뿜어냈다. 그것은 격분한 듯 더욱 맹렬하게 하진을 공격했다. 편의점 안의 모든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하진은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의 눈은 잔영수의 움직임을 좇는 동시에, 감응으로 핵의 위치를 파악했다. 잔영수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그는 몸을 낮추며 그림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지렛대를 아래에서 위로 꽂아 넣듯이 휘둘렀다.
푸욱!
이번엔 명확한 타격감이었다. 잔영수의 핵이 있던 자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림자는 비명을 지르듯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검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고, 끈적한 악취가 편의점 안을 가득 채웠다. 잔영수의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더니, 이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진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렛대 끝에 묻은 검은 액체를 닦아내며 주저앉았다. 몸의 모든 기력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또 한 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것이다.
“젠장… 진짜 죽을 뻔했네.”
손을 떨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생수 한 병을 집어 들고 단숨에 반 이상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물줄기가 온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살 것 같았다.
그리고 통조림 하나를 땄다. 녹이 슬어 낡았지만, 내용은 멀쩡한 참치 통조림이었다. 그는 숟가락도 없이 손가락으로 허겁지겁 참치를 입에 넣었다. 짠맛과 기름진 고소함이 혀를 감쌌다. 생존의 맛이었다.
배를 채우고 나니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바깥은 여전히 회색빛이었다. 이 도시에 자신 말고도 다른 생존자가 있을까. 아니, 어쩌면 모두가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거나, 이미 잔영수나 다른 ‘뒤틀린 존재’들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잠시 냉장고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한때는 평범했던 삶, 가족, 친구들… 모든 것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뒤틀린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균열이 열리고, 재앙이 시작된 그날부터, 그의 삶은 매일매일이 사투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을 것이다. 이유 같은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
하진은 배낭에 남은 생수와 통조림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다시 지렛대를 고쳐 쥐었다. 이 폐허가 된 도시 어딘가에는, 아직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 혹은 그저 또 다른 위험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는 편의점 문을 나섰다. 황폐한 거리에 다시금 발을 내딛는 그의 등 뒤로, 희미한 햇빛이 짧게 드리워졌다. 살아남기 위한 그의 여정은, 오늘 밤에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