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의 틈에서 피어난 꽃 (12화)
칠흑 같은 어둠이 낡은 송신탑 내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콘크리트 잔해 위로 스며든 차가운 공기는 금속 비린내와 함께 리안의 폐부를 찔렀다. 아르카디아의 최외곽, 버려진 구역에 위치한 이곳은 빛의 종족 ‘에테르인’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유일한 사각지대였다. 그들에게는.
리안은 망가진 계기판 위에 위태롭게 앉아 눈을 감았다. 에테르인의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는 차가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듯했다. 은빛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푸른 별 같은 눈동자가 어둠을 응시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한 사람, 아니, 단 한 존재를.
**스스스…**
아주 미세한 소리. 어둠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공간의 경계가 물결치듯 일렁였다. 그리고 그곳에, 어둠을 찢고 나타난 듯 카이가 서 있었다. 심연족 특유의 검푸른 비늘 피부는 희미한 송신탑의 잔해 빛을 받아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여러 개의 작은 수정체가 모인 카이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리안을 향했다.
“늦었잖아.”
리안의 목소리는 한숨처럼 낮게 깔렸지만, 그 속에는 안도감이 선명하게 배어 있었다.
카이는 말없이 다가와 리안의 손을 감쌌다. 그의 피부는 예상대로 차가운 금속 같은 감촉이었다. 심연족은 빛을 싫어하고, 열을 흡수하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길이 막혔어. ‘정화 순찰대’가 늘었더군.”
카이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고요한 어둠을 갈랐다.
리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화 순찰대. 에테르인 사회의 안녕을 명분 삼아 심연족을 색출하고 말살하는 특수 부대. 그들의 이름은 리안의 종족에게는 안정을, 카이의 종족에게는 죽음을 의미했다. 리안의 푸른 눈동자와 카이의 수정체 눈동자가 얽혔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절박한 사랑과, 그보다 더 숨 막히는 두려움이었다.
“더 위험해지고 있어, 카이.”
“알아.”
카이는 리안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종족의 체온은 달랐지만, 그들의 심장 박동은 거짓말처럼 같은 불안을 노래하고 있었다. 에테르인의 지배를 받는 이 행성에서, 심연족인 카이와 에테르인인 리안의 만남은 그 자체로 극형에 처해질, 가장 금지된 죄였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그때였다. 날카로운 경보음이 송신탑 바깥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어둠을 찢는 붉은 비상등 불빛이 순식간에 송신탑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젠장!”
리안이 작게 욕설을 뱉었다. 순찰대가 이 구역까지 진입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카이가 리안의 손목을 잡고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심연족은 어둠에 동화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의 몸은 그림자처럼 흐려지며 송신탑의 가장 깊고 낡은 구조물 사이로 스며들었다. 리안은 그를 따라갔다. 차가운 금속과 먼지투성이의 틈새로 몸을 구겨 넣었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콰앙! 콰앙!**
송신탑 입구가 강제로 열리는 소리, 그리고 여러 명의 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묵직한 군화 소리였다.
“이 구역에서 미등록 생체 신호가 감지되었다! 전원 수색!”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베었다.
리안은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절박하게 카이를 응시했다. 카이의 수정체 눈동자도 흔들림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토록 위태로운 균열 위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이었다. 언제 꺾여도 이상할 것 없는.
순찰대의 강렬한 탐조등 빛줄기가 내부를 훑었다. 낡은 파편과 부식된 전선, 녹슨 기계들을 샅샅이 비췄다. 빛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리안의 심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카이의 단단한 팔이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그의 차가운 몸에서 이상하게도 따뜻한 안도감이 전해져 왔다.
영원 같던 시간이 흐르고, 순찰대의 발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쪽엔 아무것도 없다! 다른 구역으로 이동한다!”
명령이 떨어지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입구가 다시 닫혔다. 붉은 비상등도 꺼졌다. 다시 칠흑 같은 어둠과 고요가 찾아왔다.
카이가 조심스럽게 리안을 어둠 속에서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낮고 불안정했다.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괜찮지 않아. 카이, 우린 언제까지 이래야 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에테르인의 냉철한 이성을 가진 엘리트 과학자였다. 하지만 카이 앞에서는 한없이 약하고, 두려움에 떨기만 하는 한 사람일 뿐이었다.
카이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처럼 일렁였다. 그는 리안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리안의 얼굴을 스쳤다.
“난 너 없이는… 빛이 없는 심연일 뿐이야. 이 어둠 속에서, 나는 네가 없으면 방향을 잃어.”
리안은 눈을 감았다. 카이의 진심이 너무나 아프게 와닿았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죄야. 에테르인과 심연족의 교류는 금지되어 있어. 우리는 이 행성 전체를 거스르고 있어.”
“네가 죄라면, 난 기꺼이 영원히 죄인이 될게.”
카이의 말은 맹세처럼 단호했다. 그의 입술이 리안의 입술에 닿았다. 차갑지만 격정적인 키스였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어둠 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그 순간, 송신탑 꼭대기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경고등이 아니었다. 인공적인 푸른빛이 탑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 송신탑 내부를 감지하고 있다는 신호처럼.
리안과 카이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찼다.
“들켰어…?” 리안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맴돌았다.
그들의 머리 위, 송신탑 잔해 너머에서 거대한 비행선의 웅장한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탐조등이 어둠을 뚫고 송신탑을 향해 집중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손길이 그들을 향해 뻗어오는 것처럼. 심연족을 향한 에테르인의 가장 잔혹한 경고등이, 바로 그들 위에서 섬뜩하게 번쩍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