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이상한 이웃
김현우는 익숙한 쇳소리와 함께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 8시 47분.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들어선 그의 15평 남짓한 공간은 낮의 북적거림이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는 것도 잊은 채, 그는 그저 현관에 기대 서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오늘도 죽겠네.”
벽에 걸린 시계는 정확히 8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똑, 딱, 똑, 딱. 작은 소리마저도 공간의 정적을 깨기에는 역부족인 듯했다. 현우는 늘 그랬듯 거실 불을 켜는 대신, 주방 쪽 작은 조명을 켰다. 은은한 주황빛이 좁은 복도를 따라 번져나갔다. 그는 어둠 속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도시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 밖은 이미 밤의 장막에 덮여 있었지만, 그의 아파트 안은 다른 세계 같았다.
냉장고 문을 열어 캔 음료를 꺼냈다. 시원한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는 듯했다. 캔 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꿀꺽꿀꺽 목 넘기는 소리가 끝나갈 무렵, 거실 쪽에서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현우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거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뭐지? 전등 나갔나?”
거실 천장에 달린 메인 조명은 몇 달 전부터 간헐적으로 깜빡이곤 했다. 올 것이 왔다는 듯 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저 음료를 비웠다. 고장 난 전등쯤이야, 이 피곤한 일상에서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 낡은 패브릭 소파는 늘 그랬듯 그를 포근하게 감쌌다.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려던 찰나, 주방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눈을 번쩍 떴다. 음료 캔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 없는데.”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그가 아침에 쓰고 놓아두었던 머그잔이 깨져 있었다.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잔이 저절로 떨어진 건가? 아니, 아침에 마신 물은 다 비웠는데. 설거지를 미룬 자신을 탓하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진이었나? 뉴스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는데. 아니면…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현우는 무릎을 굽혀 깨진 머그잔 파편들을 주워 올렸다. 유리 조각이 손끝에 스칠 때마다 묘한 한기가 느껴졌다. 주방 조명 아래, 공기는 평소와 다르게 묵직하고 차가웠다. 마치 누군가 옆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그는 애써 생각하며 파편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샤워라도 해야겠다 싶어 욕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싸늘한 냉기가 후드득 쏟아져 나왔다. 순간, 현우는 몸을 움츠렸다. 욕실 문은 분명히 닫혀 있었는데, 환풍기가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차가울 리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욕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때였다. 툭, 하고 등 뒤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욕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문고리에 걸려 있던 수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문은 분명히 닫혀 있었는데? 게다가 저 수건은 그가 어제 사용하고 빨래통에 넣으려다 잠시 걸어둔 것이었다. 문고리에 걸어둔다고 해서 저절로 떨어질 리 없었다.
“뭐야… 이거 진짜 이상하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허둥지둥 샤워기 물을 틀고 뜨거운 물을 몸에 끼얹었다. 김이 서린 거울 너머로 자신의 불안한 눈동자가 보였다. 머리로는 피곤 때문이라고 합리화했지만, 몸은 이미 본능적인 공포에 반응하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거실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아까 켜두었던 주방 조명마저 꺼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비볐다. 분명히 켜놓고 나왔는데. 그는 벽 스위치를 찾아 거실 불을 켰다. 이제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소파에 다시 앉으려던 순간.
‘치이이익…’
꺼져 있던 거실 벽걸이 TV에서 갑자기 소음이 들려왔다. 화면에는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가득했다. 현우는 리모컨을 찾으려 소파 등받이를 더듬었다. 그 순간, TV 화면의 노이즈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무수히 많은 점들이 모여들더니, 기이한 기하학적 문양을 만들어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선들과 도형들이 순식간에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우면서도 오싹한 패턴이었다. 마치 아주 멀리 떨어진 우주의 언어를 시각화한 것 같았다.
그리고 ‘팟!’ 하는 소리와 함께 TV는 다시 꺼졌다. 화면은 완벽한 암흑으로 돌아갔다.
현우는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등골을 타고 차가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이건 더 이상 피로나 우연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손에 땀을 쥐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느껴졌다. 이 공간 안에, 자신 외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누구…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가 목을 조여 왔다. 그는 더 이상 이 아파트에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이 어둠 속에서.
그는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 했다. 손에 잡히는 대신, 폰이 미끄덩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빠져나간 게 아니었다. 폰이 스스로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힌 것처럼 거실 한가운데서 잠시 멈췄다. 현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폰은 현우의 시야에서 벗어나 순식간에 벽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앙!**
섬뜩한 소리와 함께 폰은 산산조각이 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벽에 작게 금이 갔다. 거실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정적이었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한기 대신, 이제는 귓속을 파고드는 듯한 낮은 ‘웅-‘ 하는 진동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아주 멀리서,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현우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깨진 휴대폰 조각들을 보며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든 현상의 근원이 바로 저 진동인 것만 같았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아파트가, 더 이상 그의 공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 기괴한 현상의 이웃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