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지배하는 시간이었다. 낡고 부서진 탑의 가장 높은 창가, 달빛조차 닿지 못하는 그늘 아래서 리엘은 몸을 웅크렸다. 고요했지만, 고요함 속에 숨겨진 끔찍한 진실이 숨통을 조여오는 듯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돌벽의 감촉이 그녀의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
“아직… 멀었어?” 리엘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마치 오랜 시간 목마름에 시달린 이의 그것처럼 건조했다.
등 뒤에서 그림자가 일렁였다. 형체가 없는 어둠이 서서히 응집되어 단단한 남자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언제 보아도 기이하고 아름다웠다. 카일루스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별처럼 리엘을 응시했다.
“걱정 마라, 나의 별. 그들이 여기까지 쫓아오진 못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미약하게 깔린 경계심은 감출 수 없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그의 손이 리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운 온기, 그러나 그 어떤 불꽃보다 뜨겁게 리엘의 심장을 울리는 감촉이었다.
“하지만… 아까 그 소리. 분명히 그들의 추적견이었어. 이 근처까지 왔다는 거잖아.” 리엘은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기댔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안이 그 온기 속에서 잠시나마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카일루스는 창밖 어둠을 응시했다. 밤의 장막이 깊게 내려앉은 폐허의 도시, 그 아래로는 잊힌 문명들의 잔해가 무덤처럼 널려 있었다. 인간들이 ‘망자의 도시’라 부르며 발걸음을 끊은 곳. 바로 이곳이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한때는 번성했던 왕국이었으나, 지금은 그림자 종족과 망령들만이 배회하는 버려진 땅.
“그들이 우리를 찾을 리 없어. 이곳은 인간에게 저주받은 땅. 감히 발을 들일 생각조차 못 할 거다.” 카일루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어둠의 심장을 읽는 자. 이 도시를 감싸고 있는 어둠이 평소보다 훨씬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추격대가 평소보다 가까이 다가왔다는 증거였다.
리엘은 카일루스의 품에 안기며 그의 단단한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심장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그림자 종족에게 심장이란 그저 하나의 기관일 뿐, 인간처럼 격렬하게 뛰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리엘은 그 고요함 속에서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금지된 사랑. 종족의 경계를 넘어선, 온 세상이 저주하는 사랑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나 봐. 이제는 떠나야 해.” 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결의가 서려 있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들이 결코 찾지 못할 곳으로.”
카일루스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나의 별… 이미 이곳보다 깊은 곳은 없어. 이곳은 그림자의 심장부와 같으니.”
그때였다. 밖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단순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피 냄새를 맡은 사냥개가 짖어대는 소리. 그들의 추격견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금속성의 갑옷 부딪히는 소리, 거친 발걸음 소리. 그들이 정말 여기까지 온 것이다.
리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카일루스… 그들이…!”
카일루스는 망설임 없이 리엘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림자가 두 사람을 감쌌다. “두려워 마. 내가 막을 테니.”
탑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점점 선명해졌다. “이곳이다! 망자의 피 냄새와… 역겨운 인간의 냄새가 섞여 있어! 심판자들! 문을 부숴라!”
거대한 굉음이 탑 전체를 흔들었다. 낡은 철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곧이어 계단을 오르는 무자비한 발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하나, 둘… 셀 수 없는 숫자의 병사들이 몰려오는 듯했다.
카일루스는 리엘의 어깨를 붙잡고 창가로 향했다. “여기서 뛰어내려야 해.”
“말도 안 돼! 너무 높아!” 리엘은 망설였다. 이 탑은 최소한 수십 미터는 되어 보였다. 뛰어내리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내가 받아줄 테니 두려워 마라.” 카일루스의 눈동자가 잠시 어둠보다 더 깊은 색으로 변했다. 그의 손끝에서 그림자의 끈들이 솟아올라 허공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러나 동시에 계단을 박차고 올라오는 병사들의 외침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저기다! 저 이단자들을 잡아라!”
카일루스는 리엘을 밀치듯 창밖으로 던졌다. 리엘의 비명이 채 터져 나오기도 전에, 그의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휘감아 떨어지는 속도를 늦췄다. 동시에 카일루스는 뒤를 돌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감히 내 연인을 해치려 들다니…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심판자들의 병사들이 좁은 통로를 가득 메웠다. 그들의 갑옷에는 성스러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눈에는 광신적인 증오가 타올랐다. 그들은 그림자 종족을 악마의 자식이라 불렀고, 그들에게 사랑을 바친 인간을 이단자로 낙인찍었다.
선봉에 선 기사가 외쳤다. “악마의 주술사! 너의 죄는 너무나도 크다! 감히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을 타락시키다니! 지옥불에 타는 고통을 맛보여주마!”
카일루스는 비웃었다. 그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림자들이 그의 주변을 휘감으며 더욱 거대하고 위협적인 형상으로 변해갔다. “지옥불? 내가 바로 지옥 그 자체다. 너희 같은 필멸자들이 상상조차 못 할 절망을 보여주지.”
그의 손끝에서 솟아난 그림자 촉수들이 좁은 통로를 휩쓸었다. 병사들의 방패를 산산조각 내고, 갑옷을 찢어발겼다. 비명과 함께 병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심판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카일루스에게 달려들었고, 그의 그림자 속으로 칼을 꽂아 넣으려 했다.
카일루스의 육체가 잠시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그는 마치 유령처럼 병사들의 공격을 흘려보내며, 그림자를 휘둘러 그들을 짓밟았다. 그러나 그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고, 좁은 통로는 카일루스의 그림자 마법을 충분히 펼치기에는 너무 비좁았다.
저 아래에서, 리엘은 카일루스가 만들어낸 그림자 끈에 매달려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불꽃처럼 섬광이 터지고, 비명이 난무하는 탑의 창문에서 카일루스의 실루엣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카일루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푸른 눈은 리엘을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도망쳐.’ 소리 없는 외침이었지만, 리엘은 분명히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당신을 혼자 둘 수 없어!”
그러나 그의 시선은 더욱 강렬하게 그녀를 다그치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그림자 마법을 쓰면서도 동시에 리엘을 지상으로 안전하게 내려보내기 위해 힘을 쏟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의 힘이 바닥날 터였다.
결국 리엘의 발이 차가운 땅에 닿았다. 그녀는 망설일 틈도 없이 탑을 올려다보았다. 꼭대기에서 섬광이 터져 나오며,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낡은 석탑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카일루스의 희생으로 시간을 번 것이다.
“안 돼…!” 리엘은 무너지는 탑을 향해 뛰어가려 했다. 그때였다.
“흐흐흐… 역시 여기까지 내려오는군.”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리엘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심판자들의 수장이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그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두 눈은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의 손에는 피 묻은 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병사들이 말없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이미 리엘이 착륙할 지점을 예측하고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아날 생각은 마라, 이단자. 너의 죄는 이 세상의 모든 빛을 더럽혔으니, 그 대가는 죽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수장이 검을 들었다. “악마의 씨앗이 완전히 죽는 것을 네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리엘은 얼어붙은 채 탑을 올려다보았다. 무너지는 탑 위에서, 카일루스가 마지막 발악처럼 어둠의 힘을 폭발시키는 것이 보였다. 그의 힘이 서서히 소멸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
“아니…!” 리엘은 절규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제 혼자였다.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인 채, 사랑하는 연인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그녀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그녀의 몸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금지된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