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29화

차분한 새벽 공기가 지훈의 폐부를 채웠다. 새벽별이 희미하게 남아있던 하늘은 서서히 푸른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낡은 골목길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고요했다. 지훈의 손에는 닳아버린 사진 한 장과, 며칠 밤낮을 새워 찾아낸 주소지가 적힌 종이가 쥐여 있었다. 그가 찾아 헤맨 수진의 흔적은, 마침내 이 오래된 건물, ‘고요한 빛’이라는 간판이 달린 작은 공방 앞에 그를 데려다 놓았다.

수진의 그림과 놀랍도록 닮은 화풍을 가진 익명의 작가를 수소문한 끝에, 지훈은 이 공방의 주인이 그 작가를 알고 있다는 단서를 얻었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어댔다. 수많은 헛된 발걸음,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실낱같은 희망이 지금, 이 문 너머에 있었다.

철컥. 잠겨있지 않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오래된 나무 냄새와 함께 물감 냄새가 섞인 독특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공방 안은 여전히 어둑했고, 창문으로 스며드는 여명만이 실루엣처럼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미완성된 캔버스 몇 점과 다양한 그림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완성된 작품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는데, 지훈의 시선은 단번에 한 작품에 고정되었다. 어린 시절 수진이 자주 그리던,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풀꽃 그림이었다.

“누구세요?”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지훈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공방 안쪽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쉰을 훌쩍 넘긴 듯한 그녀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지만, 눈빛은 깊고 온화했다. 여인은 지훈의 손에 들린 사진과 그림을 번갈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실례합니다. 저는… 사설 탐정 박지훈이라고 합니다. 이 공방의 주인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지훈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이 공방을 운영하는 아현이라고 합니다.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신가요?”

지훈은 품속에서 수진의 낡은 사진을 꺼내 여인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십니까? 이수진이라는 사람입니다.”

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진 속 수진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녀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함께 깊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오래전 덮어두었던 상자를 다시 연 듯한 복잡한 감정이었다.

“수진이…” 아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이름은 지훈의 심장을 격렬하게 울렸다. “당신은… 수진이와 어떤 관계신가요?”

“첫사랑입니다. 아주 오래전, 예기치 않게 헤어졌지만… 지난 20년간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그녀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지훈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수진이 이 공방에 그림을 맡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실 수 있을까요?”

아현은 지훈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거짓 없는 진심과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느껴졌을까. 그녀는 천천히 작업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진이가… 그랬군요. 설마 이렇게 찾아올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현은 벽에 걸린 풀꽃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진이는 저에게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는 아이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고, 때로는 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저의 곁을 지켰죠.”

지훈은 숨을 죽였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곳에 없습니다. 한 2년 전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났어요. 더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요.”

지훈의 심장이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폐를 끼친다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현은 조용히 수진의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훈과 헤어진 후, 홀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가족과도 연락이 끊긴 채 외롭게 살았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림만큼은 놓지 않았다고 했다. 이곳 ‘고요한 빛’ 공방에서 아현을 만나 그림을 다시 시작했고, 삶의 작은 위로를 얻었다고 했다.

“수진이는 늘 자신을 외로운 풀꽃에 비유했어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피었다 지는… 그런 존재라고. 당신과 헤어진 후에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전부 내려놓은 듯했어요.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가장 행복해 보였죠.” 아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다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결국 이곳마저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제가 찾아오지 못하게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어요.”

지훈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찾아 헤맨 수진의 삶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외로웠던 것이다. 그의 부재가 그녀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까.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저는… 제가 찾아야만 합니다.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어주고 싶습니다.” 지훈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부탁드립니다, 아주머니.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단서라도 좋으니… 알려주세요.”

아현은 지훈의 간절한 눈빛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녀는 수진의 오랜 친구이자,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 역시 수진이 지훈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훈의 이 눈물과 간절함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수진이는 그림을 정말 사랑했어요. 자신이 그린 풀꽃처럼,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어 했죠. 그래서 마지막까지 그림을 놓지 않았어요.” 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수진이가 떠나기 전, 저에게 딱 한 번, 이곳으로 그림을 보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아마도 그녀의 마지막 염원이었을 겁니다.”

아현은 수첩의 한 페이지를 펼쳐 지훈에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흐릿하지만 정성스러운 글씨로 주소 하나가 적혀 있었다. 작은 산골 마을의 요양병원 주소였다.

“이곳에서 그림을 배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직접 갈 수는 없었기에, 소포로 보냈죠. 어쩌면… 아직 그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현은 지훈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가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녀를 찾아가세요. 그리고… 그녀에게 꼭 행복을 찾아주세요.”

주소지가 적힌 수첩을 받아 든 지훈의 손은 떨렸다. 요양병원. 그 단어가 주는 의미는 너무나도 아팠지만, 동시에 그녀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이었다. 그는 아현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함이 온몸을 감쌌다.

공방을 나서는 지훈의 발걸음은 더없이 무거웠지만, 동시에 한없이 가벼웠다. 20년간의 고통스러운 방황이 마침내 끝을 향해 가는 순간이었다. 아현이 알려준 주소, 그곳에 수진이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상태로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망설일 수 없었다. 새벽의 어둠이 완전히 걷히고, 밝은 아침 햇살이 지훈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헤맨 긴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그의 차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