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먼지가 가득한 공기. 깨진 유리 파편들이 햇빛에 부서져 반짝였다. 한때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거리엔 찢겨진 현수막과 뒤집힌 차량들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텅 빈 건물들의 창문은 어두운 눈처럼 이 세상의 끝을 응시하는 듯했다.
김현우는 낡은 운동화 밑창이 잔해를 밟을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 걸음, 한 걸음. 고요한 도시는 언제든 튀어나올 그림자들을 품고 있었다. 목구멍이 바싹 마른다. 물, 식량. 그리고… 항생제. 며칠 전 겪었던 작은 사고의 상처가 덧나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저기, 반쯤 떨어져 나간 간판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낡은 약국이었다. ‘청솔 약국’. 이런 이름이 아직도 기억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몇 번을 지나쳤던 곳이지만, 감염자들의 밀집도가 높아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등 뒤에 맨 배낭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안에는 며칠 치 식량과 작은 물통, 그리고 낡은 식칼이 전부였다. 이런 세상에서 사치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것들.
저 멀리서 낮고 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감염자들이다. 놈들은 소리에 민감했다. 빠르게, 그리고 조용히 움직여야 했다. 현우는 몸을 낮춰 잔해물들 사이를 요리조심 빠져나갔다. 그의 눈은 주변을 끊임없이 살폈다.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는 놈들.
마침내 약국 건물 앞에 다다랐다. 유리문은 이미 깨져 있었고, 내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약품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지저분했다. 선반은 대부분 비어있었고, 약품 포장재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누가 먼저 왔던 모양이었다. 현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있었다. 진열장 뒤편, 재고실로 보이는 문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된 나무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칼을 꺼내 들었다. 무게감이 익숙했다. 살금살금 문을 향해 다가갔다. 안은 어두웠다.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좁은 통로가 이어져 있었고, 양옆으로 선반이 가득했다. 먼지가 잔뜩 쌓인 약품 상자들이 보였다.
“젠장, 제발….”
그때였다.
뒤편에서 쿵, 하는 소리.
현우의 몸이 순간 굳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문을 닫고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놈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좁은 통로에서 두 마리의 감염자가 느릿하게 기어 나오고 있었다. 한 마리는 팔이 꺾여 축 늘어져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반쯤 썩은 얼굴로 컥컥거렸다. 일반적인 감염자였다. 처리할 수 있었다. 현우는 숨을 죽였다.
놈들이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끈적이는 피부가 서로 스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기회는 단 한 번.
놈들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현우는 그림자처럼 튀어나갔다. 재빠르게 첫 번째 감염자의 뒤로 돌아가 목을 그었다. 흐읍, 컥. 놈의 몸이 맥없이 쓰러졌다. 이어서 다른 한 마리. 칼날이 살을 가르는 둔탁한 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두 마리가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
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에 밴 피 냄새가 역했다. 그는 재빨리 선반을 훑기 시작했다. 항생제, 소독약, 진통제… 무엇이든 좋았다.
“찾았다…!”
어두운 선반 구석에서, 그는 작은 플라스틱 약병 몇 개를 발견했다. ‘페니실린’이라고 쓰인 낡은 라벨. 그리고 소독용 알코올 병. 현우는 서둘러 그것들을 배낭에 쑤셔 넣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바로 그때,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 소리는…
“씨발!”
진열장 유리가 깨지는 소리였다. 현우는 몸을 돌렸다. 약국 입구 쪽에서, 한 놈이 뛰어오고 있었다. ‘달리기 선수’인가? 아니, 놈은 훨씬 빨랐다.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팔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마치… 사냥개 같았다. ‘추격자’였다.
“크르르르…!”
놈은 마치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몸놀림은 경이로울 정도로 빨랐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건 혼자 상대할 게 아니었다. 항생제고 나발이고, 일단 피해야 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려 약국 뒤편의 작은 창문을 향해 달렸다. 낡은 창문은 그의 몸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쉽게 부서졌다. 유리 파편이 튀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땅에 착지하자마자 다시 달렸다. 뒤에서 놈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골목길을 미친 듯이 질주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폐가 불타는 느낌이었다. 놈의 발소리가 등 뒤를 바싹 따라붙는 듯했다. 어딘가 익숙한 아파트 단지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낡은 상가 건물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겨우 빌라들 사이의 좁은 틈에 숨어들었다. 놈은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쇠로 된 낡은 계단 밑에 웅크려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손바닥을 펼쳐보니, 아까 약국에서 급하게 챙겨 넣은 약병들이 보였다. 몇 개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건진 게 있었다. 가장 큰 약병을 열었다. 작은 알약 몇 개. 그리고 한 병에 담긴 주황색 액체. 진통제와… 뭔지 모를 한방 약초 같은 것이었다. 젠장, 다행히 항생제가 있었다.
문득 팔을 보니, 아까 창문을 깨고 나올 때 생긴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작은 파편이 박힌 모양이었다. 급히 응급처치를 해야 했다.
그때, 희미한 빛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손전등을 비춰보니, 낡은 시멘트 벽에 그려진 낙서가 보였다. 거칠게 그려진 그림. 해골 문양 아래,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붉은색 스프레이로 선명하게 쓰인 단어.
‘집결지’.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집결지? 대체 누가, 왜 이런 곳에? 그리고 이 글자들은… 익숙했다. 몇 달 전, 황량한 도시의 외곽을 지나다 봤던 어떤 단체들의 표식 같았다. 그들은 무장하고 있었고, 일반 생존자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멀리서 들려오는 감염자들의 울음소리.
이번엔… 수가 훨씬 많은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우는 급히 몸을 숨겼다. 상처가 아려왔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새로운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집결지’라는 낙서는…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현우는 배낭을 고쳐 메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졌다. 살아남기 위한 그의 여정은, 결코 끝날 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