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녹색의 이끼가 콘크리트 잔해 위로 기생충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한때 번화했을 거리는 이제 검게 그을린 뼈대와 뒤틀린 철골만이 앙상하게 드러난 유령 도시가 되었다. 바람은 찢겨진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앙칼진 비명 소리를 내며 낡은 건물들을 할퀴었다.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 같은 회색빛 먼지가 공기 중에 부유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서걱거리는 느낌이었다.
강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낡은 방수포 아래, 눅눅한 흙바닥에 깔린 담요 위에서 잠들었음에도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온몸의 관절이 삐걱거리는 듯한 통증과 끊어질 듯한 허리 통증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천장에 매달린 낡은 철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매달린 캔들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이다.’
바깥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해가 뜨기 전의 새벽은 가장 위험한 시간이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들은 인간의 눈에 익숙하지 않으며, 감각은 더욱 예민해진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 중 상당수는 인간에게 적대적이다.
강진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그림자처럼 소리 없었다. 침대 옆에 세워둔 낡은 금속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한때는 배관이었을 파이프의 끝은 거칠게 날이 세워져 있었다. 유일한 친구이자 방패, 그리고 때로는 칼날이 되어주는 존재.
시야는 흐릿했지만, 그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벽에 기대어 놓은 통조림 캔들을 세어 보았다. 일곱 개. 유리와 둘이서 이틀이면 동이 날 양이었다. 식수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한숨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곧 위험 신호로 받아들여지는 세계에서는, 작은 소음 하나도 생명을 위협할 수 있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강진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의 등골에는 얼음물이 흐르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유리가 낡은 모포를 걷고 일어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얼굴에는 잠에서 덜 깬 듯한 피로가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언제나처럼 옆구리에 찬 녹슨 단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강진은 유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캔들이 놓인 선반을 턱으로 가리켰을 뿐이다. 유리의 시선이 캔들을 훑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옅은 미소가 사라지고,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게… 다예요?” 유리의 목소리에 미묘한 떨림이 섞였다. “어제 점심에 먹은 게 마지막이라고 하셨잖아요.”
“정확히는 어제 점심에 먹은 게 세 개, 오늘 아침에 한 개. 그리고 이게 남은 전부다.” 강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돌멩이 같았다. “이거 가지고 이틀이다. 이제 남은 건, 한 군데밖에 없어.”
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한 군데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찢겨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 건물의 맞은편에 우뚝 솟아있는 폐허. 한때는 거대한 백화점이었지만, 지금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거대한 묘지나 다름없었다.
“거기는… 위험하다고 하셨잖아요. ‘그것’들이 우글거린다고.” 유리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녀의 손이 단검 손잡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것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아니면,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은 더 이상 없어.” 강진은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거대한 백화점 건물은 새벽의 안개에 가려져 희미한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다. “다른 곳은 이미 다 뒤져서 아무것도 안 나온다. 백화점 지하 식료품 창고에 아직 뭔가가 남아 있을지도 몰라. 마지막 희망이다.”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과 절박함이 교차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예요. 거기는 너무 넓고 복잡해요. 예전에 들어보니, 지하가 미로 같다고… 잘못하면 갇힐 수도 있어요.”
강진은 고개를 돌려 유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누가 혼자 간다고 했나.”
유리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럼… 둘이서?”
“네가 나랑 같이 가야 해.” 강진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 “내가 길을 뚫고, 네가 뒤를 봐주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그리고… 네가 날 따라오지 않으면, 나는 너를 버리고 갈 수밖에 없어. 나 혼자서는 살아야 하니까.”
유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버린다고요?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같이 왔는데…”
“이런 세상에서 ‘같이’라는 말은 사치다.” 강진은 차갑게 내뱉었다. “언제든 서로의 짐이 되면 버려질 수 있다는 걸 잊었나? 아니면… 잊고 싶었나? 나는 그럴 마음이 없어. 내 생존이 최우선이다.”
유리는 강진의 눈을 피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인간성은 오래전에 죽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만이 남았을 뿐. 그들도 여러 번 서로를 버릴 기회가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강진은 몇 번이고 유리를 버릴 수 있었다. 그녀가 약하고, 때로는 감성적인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왜일까. 유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렵고 절망적이었다.
“좋아요.” 유리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가죠. 백화점… 지하로.”
강진은 그녀의 대답에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다시 창밖의 백화점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거대한 구조물은 마치 입을 벌린 괴물처럼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강진이 말했다. “아침이 되면, 시야는 확보되지만… 움직이는 놈들이 더 많아질 거다. 이 어둠 속에서… 우리는 그림자가 되어야 해.”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은 이제 단검 손잡이를 넘어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고 있었다. 고통을 통해 현실을 자각하려는 듯. 그녀는 벽에 기대어 놓았던 작은 배낭을 챙겼다. 내용물이라곤 빈 물통과 몇 장의 낡은 천 조각이 전부였다.
“준비됐나.” 강진이 짧게 물었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강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광기가 번뜩이는 눈빛. 언제든 자신을 버리고 갈 수 있다는 경고이자, 동시에 지금은 함께 가야 한다는 무언의 약속.
“네.” 유리의 목소리는 이제 평소처럼 담담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강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전등을 꺼내 바닥을 비췄다. 작은 불빛이 주변의 먼지와 잔해들을 비추며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들은 폐허가 된 건물 지하로 통하는 낡은 계단 입구로 향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밀려왔다. 계단은 어둠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심연 같았다.
유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강진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의 손은 금속 파이프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발소리는 가능한 한 작게, 숨소리는 가능한 한 깊이 억눌렀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바깥의 바람 소리도 사라지고, 대신 정적의 무게가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정적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끔찍한 비명 소리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시멘트 벽에 그려진 알 수 없는 낙서들이 손전등 불빛에 스쳐 지나갔다. 붉은색으로 휘갈겨진 기호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흔적들은 그 자체로 위험 신호였다.
“여기야.” 강진이 멈춰 섰다.
유리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들 앞에는 철문이 있었다. 녹슬고 찌그러진 철문. 한때는 누군가의 안전을 지켜주었을 그 문은 이제 그저 낡은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문고리는 아직 건재했고, 작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강진은 손전등을 유리에게 넘겼다. “들고 있어.”
그는 품에서 작은 공구통을 꺼냈다. 녹슨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놀림은 능숙하고 빨랐다. 딸깍, 하는 작은 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유리는 숨을 들이켰다.
“들어간다.” 강진이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철문을 밀었다. 삐걱이는 굉음이 지하 공간을 가득 메웠다. 먼지가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유리는 기침을 참으며 손전등을 문 안쪽으로 비췄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좁은 복도. 양옆으로는 굳게 닫힌 철문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복도 저편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무언가 기어 다니는 듯한, 혹은 끌리는 듯한 움직임.
유리의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전등을 껐다.
“강진 씨…”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강진은 이미 금속 파이프를 고쳐 잡고 있었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그림자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숨을 죽였다. 문이 만들어낸 틈새로, 썩어가는 시취와 함께 알 수 없는 습한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복도 저편의 움직임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림자는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흐느적거리는 팔다리, 기형적으로 뒤틀린 몸.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섬뜩한 눈동자.
‘그것’이었다. 이 폐허의 진정한 주인들.
유리는 강진의 등 뒤에 바싹 붙었다. 그녀의 손은 강진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그의 체온이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 온기조차 지금 이 순간의 공포를 씻어내지는 못했다.
강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호흡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자가 완벽히 모습을 드러내기를. 아니, 그림자가 자신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가기를. 희망이었다. 덧없는 희망.
타박, 타박, 타박.
불규칙한 발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썩은 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 속에서 ‘그것’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거칠고 끈적거리는 숨소리.
바로 그때였다.
“크르르르…”
낮고 굵은 신음 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그것’이 멈춰 섰다. 강진과 유리가 숨어 있는 문 앞에서.
강진은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의 손에 땀이 배어들었다. 언제든 덤벼들 준비를 마쳤다. 살거나, 죽거나. 선택지는 단 두 가지였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전자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울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문 뒤에, 이 어둠 속에 도사린 것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어쩌면 수많은 ‘그것’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인간은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었다. 죽음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생존은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싸움의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낡은 철문 너머, 그림자 속에서 기다리는 괴물과, 숨을 죽인 채 몸을 웅크린 두 생존자. 그들 사이의 정적은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이 침묵이 깨지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