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진은 자신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시끄러운 서울의 고층 빌딩과 숨 막히는 경쟁 대신, 눈앞에는 고풍스러운 돌담과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마법 탑들이 펼쳐져 있었다. ‘루멘 마법 학원’. 이 세계 최고의 마법사들이 배출되는 요람이자, 동시에 가장 은밀한 비밀을 품고 있는 곳. 그는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이 세계에 전생한 이방인이었다. 이곳의 빛나는 명성과 화려한 마법은 그저 겉모습일 뿐이라는 섬뜩한 직감이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류진, 또 혼자서 저 아래를 보고 있군.”
친우 카이렌의 목소리에 류진은 고개를 돌렸다. 카이렌은 쾌활한 성격에 준수한 외모, 그리고 뛰어난 마법 재능까지 겸비한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반면 류진은 마법 실력은 그럭저럭이었지만, 전생의 기억 덕분인지 남들보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분석적인 사고방식이 특기였다.
“카이렌. 넌 저 지하 구역에 대해 궁금해해 본 적 없어?”
류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학원 중앙 도서관 옆에 자리한 거대한 철문이었다. 고대 마법으로 봉인된 듯한 문은 그 어떤 학생도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고, 심지어 교사들도 그곳에 대해선 언급을 꺼렸다. 학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금기였다.
“그곳? 그냥 오래된 지하 저장고나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아니면 학원 창립자들의 유물이 잠들어 있다던가. 별 쓸모도 없는 곳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 당장 다음 주에 있을 실기 시험 준비나 하는 게 어때? 네 실력으로는 장학금 놓치기 딱 좋다고.”
카이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류진은 실기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하지만 류진의 눈은 늘 그 철문과 그 너머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쫓았다. 때때로 아주 희미하게, 지하에서부터 기분 나쁜 마나의 진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느리게 박동하는 것처럼. 그리고 최근 들어, 그 진동은 더욱 잦아지고 강해지고 있었다.
며칠 뒤, 류진은 도서관 고문헌 열람실에서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루멘 학원 창립기’. 학원의 공식 역사서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고대 마법 문자로 쓰인 페이지에는 학원 지하에 거대한 ‘핵(核)’이 존재하며, 그 핵이 학원 전체의 마나를 공급한다는 내용이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핵을 ‘유지’하기 위한 ‘대가’에 대한 암시도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검게 그을려 지워져 있었다.
“핵… 대가….”
류진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울렸다. 그저 고문헌 속 헛소리라고 치부하기엔, 지하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진동과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학원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던 상급생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조기 졸업’ 혹은 ‘다른 차원 학원 전학’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들의 마법 재능은 하나같이 만개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호기심은 이내 불길한 확신으로 변했다. 류진은 밤마다 몰래 지하 철문 근처를 배회하며 마법적인 탐지를 시도했다. 철문은 그 어떤 마법도 흡수해 버리는 고대 보호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류진은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미세한 틈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마법 탐지로는 감지되지 않는, 아주 특별한 종류의 마나 흐름이었다.
그는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고서들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극히 드문 고대 결계 해제 주문과 그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반대 마법식을 찾아냈다. 이 마법은 사용자의 생명력을 소모하는 위험한 마법이었지만, 류진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보름달이 뜨고 학원 전체가 고요에 잠긴 새벽, 류진은 홀로 철문 앞에 섰다. 차가운 금속에 손을 대자, 심장 박동처럼 느껴지던 지하의 마나 진동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의 손에서 푸른 마나가 흘러나와 문을 감쌌다. 결계는 류진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며 빛을 뿜어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주문을 외웠다.
“오픈. 지혜의 문을 여소서, 금기의 그림자를 드러내소서.”
웅장한 마법진이 문에 새겨지며 번개처럼 빛났다. 철문은 거대한 굉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습하고 퀴퀴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는 어둠. 류진은 마나로 밝힌 작은 구슬을 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길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자연 동굴을 마법으로 확장시킨 듯했으며,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크리스탈로 이루어진 거대한 마나 핵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리게 박동하고 있었다. 핵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는 학원 전체에 공급되는 마나와는 차원이 다른, 불순하고 끈적한 느낌이었다.
류진은 핵 주변을 둘러싼 장치들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단순히 마나를 뽑아내는 장치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가는 마나 도관이 제단 주위에서 뻗어 나와 있었고, 그 도관들은 각각 투명한 유리관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리관 안에는… 있었다.
인간의 형체들이.
그들은 모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다. 하나같이 류진이 기억하는, ‘조기 졸업’ 혹은 ‘전학’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진 상급생들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신인 채로 유리관 속에 떠 있었고, 온몸에 마나 도관이 꽂혀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살아있는 듯했다. 그들의 몸은 기이하게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피부는 창백했고 생명력이 서서히 고갈되고 있는 흔적이 역력했다.
류진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들은 마나 핵을 유지하기 위한 ‘대가’였다. 학원의 명성을 빛낼 가장 뛰어난 마법 재능을 가진 학생들을 붙잡아, 그들의 생명력과 마나를 강제로 추출하여 거대한 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핵은 학원 전체의 방대한 마나 공급원이자, 어쩌면 학원 고위층의 영생을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결국,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군.”
류진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빛은 차가운 분노로 타올랐다. 그의 전생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 비인간적인 금기를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류진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집요한 학생이더군.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실수다, 류진.”
뒤를 돌아보니, 학원장 ‘엘도리안’이 서 있었다. 늘 인자한 미소를 띠던 그의 얼굴에는 냉혹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담고 있었다.
“학원장님… 이 모든 것이….”
“그래, 이 모든 것이 루멘 학원을 위한 것이다. 이 핵이 없다면 학원은 존재할 수 없고, 이 대륙의 평화 역시 위태로워진다. 몇몇의 희생은 대의를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지.”
엘도리안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강력한 마나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넌 이 비밀을 알아서는 안 됐어. 이제 너도 이 핵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루멘 학원을 지탱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류진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학원장의 압도적인 마나 앞에서 그의 몸은 굳어버렸다. 이대로 끝인가? 그의 시선은 유리관 속에서 미세하게 떨고 있는 상급생들의 얼굴을 향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희미한 절망감이 어려 있는 듯했다.
아니,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 끔찍한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했다.
“절대로! 당신 마음대로 두지 않을 겁니다!”
류진은 온몸의 마나를 한 점으로 모았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이 세계의 마법과는 이질적인, 파괴적인 힘이 그의 손끝에서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거대한 마나 핵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하의 거대한 공간이 류진과 엘도리안의 대결로 진동했다.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이 금기를 깨부숴야 한다. 류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죽음의 공포가 아닌, 새로운 세계의 새벽을 알리는 듯한 강렬한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