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를 깨는 파문
강민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도시의 불빛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스무 층 높이에서 내려다보이는 밤 풍경은 언제나 비슷했다. 차들은 쉼 없이 흐르고, 건물들은 저마다의 색깔로 빛을 뽐냈다. 지루하도록 평화로운 풍경. 그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 위의 따뜻한 차가 담긴 유리잔을 들었다.
요즘 들어 밤이 길었다. 아니, 밤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밤을 길게 느끼는 거였다. 예전이라면 훈련이나 수련으로 가득 채웠을 시간이 지금은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거나, 의미 없는 웹서핑으로 채워졌다. 과거와 현재의 괴리감은 때로 그를 질식시킬 것 같았다.
따뜻한 차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옅게 풍기는 국화향이 그의 예민한 신경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혔다. 잔을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스으윽.’
손에서 미끄러진 것도 아니었다. 명백히, 유리잔이 테이블 위를 미끄러졌다. 불과 몇 밀리미터. 하지만 강민의 눈에는 그 움직임이 너무나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의 손이 잔을 놓는 순간, 잔은 아주 미묘하게, 그리고 천천히 그의 손을 떠나 테이블 중앙으로 향했다.
“…….”
강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착시? 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감각은 수십 년간 갈고닦은 날카로운 칼날과 같았다. 착각할 리 없었다. 잔은 *움직였다*. 스스로.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살폈다. 고요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작은 벌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그는 다시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가 조심스럽게 같은 자리에 놓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본인조차 설득하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선 이미 오래된 감각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세상의 미묘한 흐름, 기운의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 그 감각이 아주 희미하게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밤은 깊어지고, 강민은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이 아파트에 이사 온 지 벌써 반년. 단 한 번도 이런 기이한 일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는 이 도시에서 평범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과거의 그림자를 지우고, 고요하고 평온한 일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드르륵.’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민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손잡이를 돌려 문을 당기는 것처럼. 그의 방은 잠겨 있지 않았지만, 보통은 닫혀 있었다.
강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문을 열었다.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는 아주 미세한 기척을 찾으려 애썼다. 공기의 흐름, 소리의 잔향, 하다못해 먼지의 움직임까지.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거실의 문은 닫혀 있었다. 그가 잘못 들은 걸까?
“젠장.”
거실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 방금 전까지 그가 읽던 무협지가 펄럭이고 있었다. 창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는데, 책장은 마치 강한 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맹렬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페이지가 찢어질 듯이 펄럭이는 소리가 기괴하게 울렸다.
강민의 등골에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어떤 존재가, 어떤 힘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다. 그가 한발 다가서자, 책장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와라.”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그 안에 담긴 내공은 공간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과거 그의 목소리 한 마디에 백 명이 넘는 무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대답은 고요뿐이었다.
그때였다. 거실 천장의 조명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불규칙하게, 마치 곧 수명을 다할 전구처럼. 그리고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꺼져버렸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강민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공기 중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어떤 존재의 ‘생기’ 혹은 ‘탁기’ 같은 것이었다. 그는 서서히 오감의 문을 열었다. 시각, 청각은 물론, 촉각과 후각, 그리고 육감까지.
‘쏴아아아-’
거실 한쪽에 놓인 오래된 라디오에서 갑자기 잡음이 터져 나왔다. 채널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소리는 점점 커지고 불쾌한 굉음으로 변해갔다. 동시에 부엌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릇이 깨지는 소리였다.
강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혈관 속으로 뜨거운 피가 빠르게 돌았다.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야수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도발인가.”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부엌을 향해 걸어갔다. 라디오의 굉음은 점점 더 커지고, 부엌 안에서는 무언가 계속해서 던져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끔찍한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부엌 문턱에 다다랐을 때였다.
‘콰아앙!’
부엌 안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동시에 냉장고 문이 활짝 열리며 그 안에 있던 식료품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우유팩이 터지고, 야채들이 이리저리 튀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식칼 한 자루가 엄청난 속도로 강민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강민은 눈 깜짝할 새에 몸을 틀었다. 그의 몸은 마치 허공에 그려진 한 줄기 바람처럼 유려하게 움직였다. 칼날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 벽에 박혔다. 섬뜩한 금속성이 울렸다. 칼자루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강민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빛이 완전히 변했다. 더 이상 평범한 도시의 소시민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기운이 마치 용솟음치듯 뿜어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실루엣은 마치 거대한 산맥처럼 느껴졌다.
“꽤나 건방진 손님이군.”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낮고, 위압적이었다. 식칼을 날린 존재를 향한 명백한 경고이자, 일종의 도전이었다. 이 아파트는, 더 이상 고요한 은둔처가 아니었다. 이제 막, 오래된 전쟁의 서막이 열린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