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노을이 지평선 너머로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강율은 찢어진 방호복 소매를 잡아당겨 끈적이는 땀을 닦아냈다. 먼지투성이 바람이 거친 숨소리처럼 폐허가 된 도시를 훑고 지나갔다. 빌딩 잔해들은 거대한 뼈대처럼 앙상하게 하늘을 찔렀고, 그 아래로 녹슨 철근과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수없이 흩뿌려져 있었다. 여기는 더 이상 인간의 세상이 아니었다. 잿빛 재앙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지 십 년. 강율은 겨우 스무 해를 살았지만, 그의 눈빛은 백 년을 넘게 산 노인처럼 피폐하고 지쳐 있었다.
“젠장, 오늘은 아무것도 없군.”
강율은 텅 빈 배낭을 다시 고쳐 메고 낮게 중얼거렸다. 식량은 바닥났고, 며칠 전 겨우 발견했던 캔 하나도 이미 오래전에 소진되었다. 물도 간당간당했다. 이런 날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그의 심장을 조여오는 불안감이 유독 컸다. 어쩌면 오늘은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
그는 부서진 아파트 단지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갔다. 발밑에서 깨진 유리 조각들이 불길한 소리를 냈다. 어디선가 괴이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이곳에 밤이 찾아오면,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오는 것들은 배고픔보다 더 끔찍한 공포를 불러왔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허물어진 상점 건물 한 구석에 꽂혔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그곳만 유독 덩굴과 이끼에 뒤덮여 있었다. 마치 거대한 녹색 괴물이 낡은 건물을 집어삼킨 듯했다. 그리고 그 덩굴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고대 문양 같은 것이 그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이건… 뭐지?”
호기심은 언제나 생존자의 적이지만, 때로는 한 줄기 동아줄이 되기도 했다. 강율은 망설임 끝에 덩굴을 걷어냈다. 끈적하고 질긴 식물 줄기가 그의 손에 감겼다. 덩굴 아래에는 예상보다 훨씬 오래된,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아치가 드러났다. 아치 위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손전등을 꺼내 비추자, 먼지에 뒤덮였던 입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은 완전히 암흑이었다. 곰팡이 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독특한 악취를 풍겼다. 강율은 잠시 망설였다.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니, 위험할 확률이 9할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선택지는 죽느냐 사느냐였다. 모험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터였다.
결심한 듯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입구 안쪽은 좁고 비좁은 통로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통로가 깊어질수록 밖의 소음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오직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벽에 부딪혀 울렸다. 통로는 이따금 무너진 흔적을 보여주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의 끝에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마다 석조 기둥들이 솟아 있었고, 천장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분명 고대에 만들어진 유적이었다. 도심 한복판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다니. 재앙 이전에 존재했던 사람들은 이런 곳의 존재를 알았을까?
강율의 시선은 공간 중앙에 놓인 제단으로 향했다. 낡은 제단 위에는 손바닥만 한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흑단으로 된 테두리에 푸른 비취가 박혀 있었고, 거울 표면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맑았다. 강율은 홀린 듯 거울로 다가갔다.
“이게 뭘까…?”
그가 조심스럽게 거울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거울 표면에 닿는 순간, 차가운 한기가 손가락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동시에 제단 주변의 석조 기둥에 새겨진 문양들이 푸른빛을 내며 반짝였다. 공간 전체가 희미한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강율은 깜짝 놀라 손을 떼려 했지만, 거울이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달라붙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울창한 숲, 거대한 바위산,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정체 모를 힘. 자연 그 자체의 원초적인 에너지였다. 그는 압도적인 힘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콰아앙!
바로 그때, 외부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폭발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유적 전체가 진동하며 천장에서 돌가루가 쏟아졌다. 강율은 거울을 놓치고 쓰러졌다. 통로 쪽에서부터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들려왔다.
“망할…! 저 놈들이 여기까지?”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외부에서 종종 마주치던 ‘균열수’였다. 재앙 이후 나타난 변이된 짐승들. 평소에는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는데, 아마 폭발음이 균열수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쩌억!
통로 입구의 잔해가 박살 나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균열수는 늑대와 곰을 섞어놓은 듯한 끔찍한 형상이었다. 비늘 같은 피부는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핏빛 눈동자는 굶주림으로 이글거렸다. 날카로운 발톱은 땅을 긁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강율은 절망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녹슨 칼로는 저 거대한 짐승에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을 터였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그때였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푸른 비취 거울로 향했다. 아까 느꼈던 그 차가운 한기, 그리고 알 수 없는 영상들. 실낱같은 희망이 그의 마음속에 피어났다.
“설마…?”
그는 재빨리 거울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비취가 그의 손에 다시 감기는 순간, 온몸에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균열수가 으르렁거리며 덤벼들었다. 그 거대한 몸집이 순식간에 강율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짐승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물러서!”
강율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와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비취 거울에서 푸른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빛은 거울을 감싸고 있던 흑단 테두리의 고대 문양을 따라 흐르더니, 이내 강율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마치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균열수의 날카로운 발톱이 강율의 코앞에 닿으려는 순간, 그의 발밑의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쩌억, 쩌억! 거대한 균열이 바닥에 생기더니, 날카로운 바위 기둥들이 솟아올랐다. 마치 땅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순식간에 수많은 바위 기둥들이 균열수의 몸을 꿰뚫고 솟아났다.
크아아아악!
균열수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단단한 비늘조차 뚫어버린 바위 기둥들에 몸이 고정된 채, 짐승은 버둥거렸다. 푸른빛은 여전히 강율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비취 거울은 맹렬하게 빛났다. 그의 시야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문양들이, 그의 의지와 함께 땅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마법이었다.
강율은 혼란스러운 동시에 전율했다. 그는 살면서 이런 힘은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재앙 이전의 기록에서도 이런 종류의 힘은 신화 속에나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안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균열수는 결국 힘없이 쓰러졌다. 바위 기둥에 꿰뚫린 채 축 늘어진 모습은 방금 전의 흉악했던 기세가 거짓말 같았다. 푸른빛이 서서히 잦아들고, 강율의 손에 들린 거울도 원래의 푸른 비취빛으로 돌아왔다. 그의 몸에서는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게… 대체… 뭐지?”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울을 내려다보았다. 거울은 이제 평범한 유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강율은 알 수 있었다. 이 거울이, 그리고 그 안에 잠재된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냈다는 것을.
폐허가 된 도시의 어둠 속에서, 강율은 손안의 비취 거울을 꽉 쥐었다. 이 힘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이곳에 왜 숨겨져 있었는가? 수많은 질문들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재앙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고 희망조차 사라진 줄 알았던 세상. 하지만 어쩌면, 어딘가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과 힘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강율은 비록 살아남았지만, 그의 삶은 이제 완전히 달라질 터였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고대의 힘을 쥔 자였다. 이 힘이 새로운 희망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의 손에 들린 푸른 비취 거울은 이 잿빛 세상에 새로운 변수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 변수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의 피폐했던 눈빛에, 처음으로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생기가 깃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