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29화


#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29화

이지훈은 손에 들린 낡은 사진 한 장을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흑백 사진 속에는 앳된 서연과 자신이 나란히 서 있었다. 수십 년 전, 잿빛 벽돌 건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 지훈은 그 건물의 외형이 어딘가 낯익다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전날 밤, 오래된 상자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사진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었다. 사진 뒷면에 희미하게 적힌 메모, ‘꿈을 심는 자리.’ 그리고 알아보기 힘들게 휘갈겨 쓴 주소 조각.

그 주소는 잊혀진 시간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 겨우 찾아낸 골목 어귀의 낡은 예술 공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훈은 새벽부터 지도를 들고 헤매다 마침내 이 오래된 건물 앞에 섰다. 낡은 간판에는 빛바랜 글씨로 ‘별 헤는 갤러리’라고 적혀 있었다. 서연이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예술가의 꿈,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나던 수많은 스케치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곳이 정말 서연과 연결된 곳일까.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숨겨진 흔적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낡은 나무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지 않았지만, 벽면 가득 걸린 그림들이 아늑하고도 깊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래된 물감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희미하게 공중에 떠돌았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갤러리는 텅 비어 있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그림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의 시선은 혹시라도 서연의 그림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그의 기억 속 서연은 늘 따뜻하고 서정적인 풍경화를 좋아했다. 이곳의 그림들은 대부분 추상적이거나 현대적인 작품들이었다.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갤러리 안쪽, 작은 작업실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 죄송하지만, 혹시 계신가요?”
지훈의 목소리에 인기척이 멈췄다. 잠시 후, 주름진 얼굴에 안경을 쓴 노년의 여인이 작업실 문을 열고 나왔다. 단정하게 묶은 흰 머리카락과 온화해 보이는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이 드문 곳이라 놀랐네요. 혹시 찾으시는 작품이라도 있으신가요?”
여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훈은 주머니에서 서연과 함께 찍은 사진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실례합니다. 제가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혹시 이 여인을 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진을 받아든 여인의 눈빛이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

잊혀진 이름, 기억 속의 그림

여인은 한참 동안 사진 속 서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 아이… 참 낯이 익네요. 오래전, 이곳에 그림을 배우러 오던 학생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었다. “학생이요? 그럼…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혹시 기억나세요?”
여인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이… 하지만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은 잊히지 않아요. 유독 생명력이 넘치고 따뜻했죠. 특히 볕이 잘 드는 언덕에 피어난 들꽃들을 자주 그렸어요.”

들꽃. 그 단어에 지훈의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렸다. 서연은 늘 들꽃을 좋아했다. 소박하고 강인한 아름다움이 자신과 닮았다며, 작은 들꽃 하나에도 행복을 느끼던 그녀였다.
“혹시 그 그림… 지금도 이곳에 있나요?”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아이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어떤 분이 오셔서 전부 구매해 가셨어요. 그 아이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분이 그림을 사면서 아이에게 작은 후원금을 주고 가셨습니다.”

후원금. 그림으로 번 돈. 서연이 어려웠던 시절을 그림으로 버텼을 거라는 생각에 지훈의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녀의 맑고 순수했던 웃음 뒤에 숨겨진 아픔이 있었을까.

새로운 단서, 새로운 길

“그분을 아시나요? 그림을 구매해 가신 분 말입니다.”
지훈은 다급하게 물었다.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작업실로 돌아가 낡은 장부를 들고 나왔다.
“오래된 기록이라 희미하지만… 여기 이름과 연락처가 있네요. ‘박정희’라는 분이셨어요. 당시 신진 작가들을 후원하던 사업가였는데, 지금은 연락처가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지훈은 박정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몸이 굳어버렸다. 이전에 서연의 흔적을 쫓던 중, 그녀가 잠시 인연을 맺었던 복지재단 이사장과 이름이 같았다. 설마… 그 재단이 이 갤러리에서 그림을 산 것이었을까? 복잡한 연결고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여인은 지훈의 표정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때 그 아이는 그림을 팔고 받은 돈으로 멀리 떠난다고 했어요. 이곳을 떠나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고… 그 이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주 희망에 찬 눈빛이었어요.”

희망에 찬 눈빛. 지훈은 그 말을 되뇌었다. 서연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고, 자신은 이제 겨우 그녀의 과거 한 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의 새로운 시작이 과연 행복했을까. 그리고 그녀가 원했던 시작 속에 자신이 있을까.

지훈은 여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갤러리를 나섰다. 갤러리 문을 닫는 순간, 그는 문득 갤러리 입구 옆 작은 벽면에 새겨진 조각을 발견했다. 닳고 닳아 겨우 형체만 남은 작은 꽃 모양의 조각. 그리고 그 아래, 희미하게 새겨진 이니셜 ‘S. Y.’.

서연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남긴 마지막 흔적.
그는 조각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벽돌 너머로 그녀의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새로운 희망과 함께, 그녀의 지난날에 대한 아련한 아픔이 밀려왔다. 박정희라는 이름. 그 이름이 지훈을 서연에게로 더 가까이 이끌어줄 열쇠가 될 것인가. 그는 결심했다. 반드시 그 복지재단을 다시 찾아가야 한다고. 서연이 떠난 ‘새로운 시작’의 끝을 알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