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노을이 핏물처럼 하늘을 적시던 때, 재원은 폐허가 된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숨을 골랐다. 멸망의 불꽃이 모든 것을 삼키고 스러진 지 수십 년. 살아남은 이들은 흩어져 유령처럼 떠돌거나, 숨겨진 안식처를 찾아 끊임없이 헤맸다. 재원은 후자였다. 그의 목적지는 언제나 하나였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한때 모든 마법사들의 꿈이었던 ‘크리스탈 마법 학원’.
학원은 도시의 북동쪽, 거대한 암반 위에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증명하듯, 수정처럼 빛나던 첨탑들은 이제 부서지고 금이 가 삭막한 황혼 속에서 음산하게 솟아 있었다. 덩굴식물들이 건물의 벽을 타고 오르며 창문들을 집어삼켰고, 한때 마력이 흐르던 돌계단은 오랜 풍화작용으로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재원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전설은 학원이 멸망 속에서도 홀로 건재했으며, 그 지하 깊은 곳에는 최후의 마법 지식이 봉인되어 있다고 속삭였다. 혹은, 학원을 지키던 결계가 대재앙을 막아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어떤 긍정적인 희망도 허락하지 않았다.
정문은 거대한 철문이 통째로 뜯겨나가 내부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텅 빈 교실, 마법진이 새겨진 강의실, 그리고 마법 도구들이 널브러진 실험실들은 시간이 멈춘 듯 정지해 있었다. 부서진 칠판 위에는 지워지지 않은 마법 공식이 남아 있었고, 곳곳에 널린 두루마리들은 바스러지기 직전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때 지성으로 빛났던 존재들의 흔적이었다.
“아무도 없나…”
며칠을 학원 내부를 탐색했지만, 재원은 생존자의 흔적은커녕 마물 한 마리조차 만나지 못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마치 학원 자체가 거대한 무덤이라도 되는 양, 모든 소리와 움직임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의 발걸음만이 메아리처럼 울릴 뿐이었다.
재원은 마침내 학원의 중심부, 한때 거대한 도서관이었을 곳에 도착했다. 수백만 권의 장서들이 꽂혀 있었을 책장은 대부분 비어 있거나, 남아있는 책들은 곰팡이에 뒤덮여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했다. 먼지 쌓인 중앙 홀에는 거대한 수정 조각상이 서 있었다. 균열이 가득한 조각상은 한때 빛을 발했을 거대한 마법 램프였던 것 같았다. 그 아래, 재원은 숨겨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조각상 밑바닥에 새겨진 마법진.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것과도 달랐다. 생명의 기운을 흡수하는 듯한 기묘한 문양들이 얽혀 있었고, 그 중앙에는 옅은 균열이 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균열을 따라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자마자,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마법진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조각상 전체가 지축을 울리며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 아래,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은 미세한 푸른빛을 발하며 끝없이 깊은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공기부터 달랐다. 위층의 먼지 섞인 건조함과는 달리, 이곳의 공기는 습하고 무거웠으며, 알 수 없는 비릿한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결계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건가?”
재원은 주저했다. 본능이 경고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지의 지식에 대한 갈망이 그를 아래로 이끌었다. 그는 낡은 랜턴을 켜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수록 푸른빛은 강렬해졌고, 비릿한 냄새도 짙어졌다. 이윽고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 양옆으로는 육중한 강철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강철문 하나를 조심스럽게 열자,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부는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중앙에는 크고 작은 유리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유리관 안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부유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재원은 랜턴을 높이 들어 올렸다. 유리관 속 내용물은 마치 인간의 형상을 억지로 비틀고 늘인 듯한, 끔찍하게 변형된 생명체들이었다. 어떤 것은 여러 개의 팔다리가 뒤죽박죽 얽혀 있었고, 어떤 것은 피부가 벗겨진 채 신경망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마치 어린아이의 형상을 억지로 기계에 연결한 듯 보였다. 그들은 모두 미세한 전류 같은 푸른빛에 휩싸여 천천히 맥동하고 있었다. 마치 심장처럼, 혹은 고통받는 영혼처럼.
재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건 단순한 실험이 아니었다. 이건… 학살이었다. 혹은 그보다 더한 것.
그는 가장 큰 유리관으로 다가섰다. 높이 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관 안에는 인간의 형상과 가장 유사한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십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육신 곳곳에는 알 수 없는 룬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자들이 빛을 발할 때마다 관 전체가 희미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재원의 귓가에, 환청처럼 혹은 실제처럼,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살려줘…
목소리는 수많은 영혼이 한데 뭉쳐진 듯, 혹은 수많은 고통이 한데 뒤섞인 듯 섬뜩했다. 재원은 뒷걸음질 쳤다. 그 목소리는 분명 유리관 속 존재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유리관 속 *모든* 존재로부터.
벽 한쪽에는 낡은 단말기가 놓여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희미한 삑 소리와 함께 화면이 켜졌고, 오랜 기록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기록 234호: 피험체 ‘아르카나’의 활성화율 87% 도달. 에너지 출력 양호. 수십 개체 동시 운용 시 학원 결계 유지 가능성 확인.]
[기록 412호: 피험체 ‘세라핌’ 추가. 기존 피험체들의 에너지 소모율 감당 불가. ‘공명 흡수 방식’ 도입 예정.]
[기록 589호: 지상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 학원 결계의 에너지 고갈 위기. 지하 시설의 완전 가동만이 유일한 희망. 모든 연구원은 즉시 지하로 대피. 피험체 활성화율 100% 목표.]
기록들은 학원이 어떻게 대재앙 속에서 살아남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학원은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시설에서,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결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마법 학원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존엄성을 송두리째 짓밟는 금기.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들을 만들어냈고, 그들의 고통을 에너지로 삼았다.
재원의 눈앞에 유리관 속 생명체들이 다시 보였다. 그들은 단순한 피험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누군가의 친구였으며, 누군가의 동료였을 것이다. 이 학원의 위대한 마법사들은, 어쩌면 이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한 장본인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거대한 유리관 속 존재가 꿈틀거렸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재원을 응시했다. 무언의 절규가 그의 정신을 꿰뚫는 듯했다. 공포가 아닌, 거대한 슬픔과 분노가 그를 덮쳤다. 이 존재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들은 학원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영원한 고통 속에서, 학원을 지탱하는 심장이자 저주였다.
갑자기, 학원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층에서 돌덩이가 떨어지는 소리, 철골이 비틀리는 끔찍한 소음이 들려왔다. 지하 시설의 기계들이 불규칙하게 삐걱거리며 빛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지?”
단말기에 새로운 메시지가 긴급하게 떴다.
[경고: 지하 시설 과부하. 에너지 역류 감지. 피험체 통제 불능. 결계 붕괴 임박.]
결계가 붕괴되고 있었다. 학원을 지탱하던 끔찍한 마력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 금기는 마침내 스스로를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재원은 급히 뒤돌아섰다. 그는 더 이상 이 지하 깊은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이 끔찍한 진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그의 영혼은 피폐해졌다. 그는 힘껏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 같은 기계음과, 유리관이 깨지는 듯한 파열음이 그의 귀를 찢었다.
밖으로 나오자, 학원의 첨탑 하나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핏빛 노을은 여전히 하늘을 덮고 있었지만, 이제 그 아래의 세계는 무언가 더욱 끔찍한 것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재원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크리스탈 마법 학원, 그 위대한 이름 뒤에 숨겨진 어둠. 그것은 멸망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던져진, 가장 섬뜩한 경고였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금기. 그 기억은 재원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새겨질 것이었다. 폐허가 된 세상은 여전히 위험했고, 그는 다시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그는 끔찍한 진실을 짊어진 증인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어쩌면 이 세상의 멸망보다 더 거대한 재앙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를 잠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