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회색빛 구름을 몰고 비탄의 골짜기를 휘감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협곡 아래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들이 마치 거대한 짐승의 뼈대처럼 솟아 있었다. 그 사이, 가파른 절벽을 깎아 만든 좁은 길 위로 오색찬란한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저마다 내뿜는 강렬한 기세는 삼엄한 침묵 속에서도 쉬이 가라앉지 못하고 골짜기 전체를 압박했다.
백련은 묵직한 검집 위로 엄지손가락을 쓸어내리며 무심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천하무결대회라는 미명 아래, 전국 각지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이곳 비탄의 골짜기, 심연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허나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협을 논하는 자들의 숭고한 열정이 아닌, 탐욕과 불안에 잠식된 인간 군상의 그림자였다. 몇 년 전부터 세상에 떠돌던 기이한 소문, 알 수 없는 재앙의 징조들이 이 대회의 개최와 맞물려 더욱 음습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백련 도형, 오랜만입니다.”
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푸른 도포를 걸친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철혈문의 문주, 강호에서 ‘광풍검’이라 불리는 사내, 강무(姜武)였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날카로운 살기를 품고 있었다.
“강무 문주.” 백련은 짧게 답했다. 불필요한 대화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다.
강무는 백련의 무뚝뚝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곁으로 다가섰다. 그의 시선은 백련의 허리에 찬 검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골짜기 깊숙한 곳을 향했다. “이런 음습한 곳에서 천하무결대회를 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습니다. 혹 백련 도형은 들으신 바 없으십니까? 이 심연궁에 대한 오래된 소문을 말입니다.”
백련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소문은 차고 넘쳤다. 심연궁이 태고의 악귀를 봉인한 곳이라는 둥, 대회가 사실은 그 악귀에게 바쳐질 거대한 제물이라는 둥, 끝없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백련은 실체를 알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에 쉽사리 현혹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스승의 유언이었다. ‘백련아, 심연궁에서 열리는 대회에 반드시 참여하여라. 그리고, 그곳의 진실을 목도하고 모든 것을 막아야 한다.’
그때였다. 으스스한 골짜기의 정적을 깨고, 기이하고 불길한 공명이 울려 퍼졌다. 콰앙-! 콰앙-!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단순한 음향이 아니라, 듣는 이의 심장을 직접 죄어오는 듯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무인들의 얼굴에 일순간 당혹감과 공포가 스쳤다.
“저, 저것은…!” 강무가 경직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골짜기 가장 깊은 곳, 암벽을 뚫고 지어진 심연궁의 거대한 흑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빛이 아니라, 짙고 탁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희미하게 빛나던 주변의 횃불마저 집어삼키는 듯했다. 공기 중에는 비릿한 피 냄새와 썩은 흙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향취가 감돌았다.
백련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평생을 강호에서 보낸 그의 육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대회는 평범한 무술 대회가 아니었다.
마침내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안에서 걸어 나오는 인물이 있었다. 심연궁의 주인이자 이번 대회의 주최자로 알려진 자, 흑포괴인이었다. 얼굴을 가린 검은 두건과 그림자 속에 파묻힌 듯한 형체는 그가 인간인지조차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의 손에는 섬뜩하리만큼 붉은색의 수정구가 들려 있었다. 수정구 안에서는 무언가 검은 액체가 일렁이는 듯했다.
흑포괴인이 멈춰 서자, 심연궁 안에서 기이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그로테스크한 화음이었다. 무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모두 잠잠하라.” 흑포괴인의 목소리는 낮고 음산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모든 이의 귓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듯했다. “천하무결대회에 모인 강호의 영웅들이여. 너희는 그저 무예를 겨루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그 말에 술렁이던 분위기는 일순간 정지했다. 모든 시선이 흑포괴인에게로 향했다.
“세상이 병들었다. 혼돈에 잠식되어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 이를 정화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지존이 필요하다.” 흑포괴인은 들고 있던 붉은 수정구를 높이 치켜들었다. 수정구는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붉게 박동하며 섬뜩한 빛을 내뿜었다. “이 대회는 단순한 무예의 경연이 아니다. 지존의 자리를 두고 겨루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그리고 그 의식의 최종 승자에게는, 천하의 운명을 뒤바꿀 권능이 주어질 것이다.”
권능. 그 단어에 무인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은 단순히 무력만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권능’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욕망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 권능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흑포괴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이곳 비탄의 골짜기, 심연궁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너희의 모든 것을 시험할 것이다.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까지…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었는가?”
그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붉은 수정구가 폭발하듯 강렬한 섬광을 터뜨렸다. 비명조차 지를 틈도 없이,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몇몇 무인들이 섬광에 휩싸여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렸다. 옷가지조차 남지 않은 채, 그들의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싸늘한 침묵이 골짜기를 지배했다. 방금 전까지 무용을 뽐내던 강호의 고수들은 일순간 벌레처럼 움츠러들었다. 공포가 그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백련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검집을 쥔 채 바싹 힘을 주었다. 눈앞의 광경은 그가 상상했던 무림대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것은 살육이었다. 명예를 건 무인들의 대결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주최되는 광기에 찬 의식이었다.
흑포괴인은 섬광이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며 낄낄거렸다. 그 웃음은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섬뜩하고 메말라 있었다. “겁먹을 필요는 없다. 시작에 불과하니.”
그리고 그의 시선이 백련을 향했다.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듯한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진정한 의식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지옥 같은 고통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자만이, 비로소 진정한 권능을 마주할 자격을 얻으리라.”
흑포괴인이 손짓하자, 흑철문 뒤편에서 거대한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핏빛으로 물든 채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제단이었다. 제단 위에는 녹슬고 낡은 칼날들이 꽂혀 있었고, 그 칼날 사이사이에 인간의 머리뼈로 보이는 것들이 섬뜩하게 놓여 있었다.
무인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비명과 술렁임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다리는 이미 공포에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백련의 등골을 차가운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스승이 말했던 ‘진실’은 이것이었을까? 이 광기와 섬뜩한 의식이 바로 스승이 그토록 막으려 했던 것이었을까?
그 순간, 제단 위에 놓여 있던 붉은 수정구가 더욱 맹렬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핏빛 액체가 소용돌이치며 형언할 수 없는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어둠과 광기, 그리고 피가 뒤섞인, 비탄의 골짜기의 진정한 막이 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