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운해(雲海)에 깃든 붉은 운명
수천의 발걸음이 일으킨 흙먼지가 만산령(萬山嶺)의 푸른 하늘을 뒤덮었다. 겹겹이 솟은 산봉우리 사이, 청룡의 비늘처럼 펼쳐진 광활한 평원에 임시로 세워진 거대한 비무성(比武城). 그곳은 지금, 천하의 모든 무인(武人)들이 숨죽이며 응시하는 운명의 교차점이었다.
유건은 낡은 삿갓을 고쳐 쓰고 삐걱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 달여를 걸어 도착한 이곳은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웅장하고, 동시에 무거웠다. 삿갓 아래로 언뜻 보이는 그의 눈은 고요한 호수처럼 흔들림이 없었으나, 얇게 다문 입술은 짊어진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품속에는 돌아가신 스승님의 유품인 낡은 목패 하나와, 도(道)와 뜻을 함께 새긴 푸른 비단 주머니가 전부였다.
“이게 바로 천하운명결정비무(天下運命決定比武)로구나.”
나직이 읊조린 그의 목소리는 수많은 인파의 웅성거림에 금세 묻혔다. 이름 없는 한 명의 무인에 불과한 그에게, 이 거대한 흐름은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유건은 자신의 길을 의심하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그리고 그의 가슴 깊이 새겨진 다짐만이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평원 곳곳에는 각 문파의 깃발이 오색찬란하게 펄럭였다. 저마다 천하를 호령하는 거대 문파의 상징들은 위풍당당하게 하늘을 찔렀고, 그 아래로 수많은 무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화로운 축제의 장 같았으나, 공기 중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유건은 낡은 차림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갔다. 그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무인들의 시선은 대부분 무관심하거나, 경멸 어린 것이었다. 허름한 행색에 검은 그림자처럼 수척한 얼굴, 그리고 흔해 빠진 목검 하나를 들고 있는 그에게서 누구도 ‘천하운명결정비무’의 참가자를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유건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저 멀리, 하늘 높이 솟아오른 비무대의 붉은 깃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붉은 깃발에는 검은 먹으로 한 글자가 힘차게 휘갈겨져 있었다.
— 命 (명) —
운명! 그것은 곧 다가올 혼돈의 시대를 막고, 무림의 평화와 백성들의 안위를 결정할 단 하나의 선택을 의미했다. 지난 몇 년간, 천하에는 전례 없는 기근과 역병이 창궐했고, 각지에서는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도적 떼의 준동이 끊이지 않았다. 혼란은 극에 달했고, 그 배후에는 무림 각지의 패권 다툼과 음모가 숨어 있었다. 이에 천무맹(天武盟)을 중심으로 한 무림의 현자들은 고심 끝에 이 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승자는 천하제일인이 되어 모든 무림의 구심점이 될 것이며, 그에게는 혼란에 빠진 천하를 바로잡을 권능과 책임이 주어질 터였다.
유건은 비무성 초입에 마련된 접수처 앞에 섰다. 줄은 길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내로라하는 문파의 고수들이었다. 저마다 번쩍이는 무기와 화려한 의복, 그리고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기운은 이 대회의 수준을 짐작하게 했다.
“다음!”
접수 담당자의 목소리에 유건은 앞으로 나섰다. 탁자에 앉은 중년의 무관은 흘끗 유건을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문파 소속이냐? 참가증은 있고?”
유건은 품속에서 낡은 목패를 꺼내 조용히 내밀었다. 목패에는 흐릿하게 새겨진 ‘청운’이라는 글자가 전부였다.
무관은 코웃음을 쳤다. “청운? 그런 문파는 들어본 적도 없다. 이딴 허접한 목패를 가지고… 장난치는 게냐?”
그 순간, 접수처를 지나가던 한 무리가 멈춰 섰다. 붉은 비단을 두른 호화로운 차림의 사내, ‘혈검(血劍)’이라는 별호로 천하를 주름잡는 악명 높은 살수(殺手) 문파, 흑룡회(黑龍會)의 고수였다. 그는 비웃듯 유건을 돌아보았다.
“거참, 별 거지 같은 놈이 다 기어 들어오는군. 천하운명결정비무가 동네 잔치인 줄 아나 보지?”
곁에 선 흑룡회 무사들이 낄낄거렸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무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무관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목패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규정은 규정이야. 명확한 소속이 없으면…”
그때, 비무성 중앙에서 웅장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심장을 울리는 소리가 평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비무대로 향했다.
“천무맹맹주(天武盟盟主)께서 등단하신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붉은 깃발이 꽂힌 비무대 위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등장은 모든 웅성거림을 잠재웠고, 수천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강자 중의 강자, 천무맹의 수장인 ‘화룡자(火龍子)’였다.
화룡자는 평원에 모인 모든 무인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웠으나, 동시에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제군들,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모두가 알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비록 늙었으나, 기운을 실어 평원 끝까지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천하는 혼돈에 빠졌고, 백성들은 고통받고 있다. 무림은 분열되었고, 수많은 악의가 암약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비극을 좌시할 수 없었다. 하여, 천무맹은 중대 결정을 내렸다. 이 자리에서, 천하의 운명을 책임질 단 한 명의 무인을 가려낼 것이다!”
화룡자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렸다.
“그는 곧 다가올 어둠을 물리칠 등불이 될 것이며, 흩어진 무림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이 될 것이다. 그는 곧 천하의 새로운 질서를 세울 대도(大道)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비무대 중앙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석비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그 빛이 점차 사라지자, 석비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예선전 참가자들의 명단이었다.
유건은 접수처의 무관에게서 낡은 목패와 함께 받은 종이 한 장을 묵묵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이름, ‘유건’, 그리고 배정된 비무장의 번호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붉은 깃발의 ‘命’ 자를 향했다. 운명. 과연 그 운명이 자신에게 어떤 길을 제시할지, 유건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오직 그의 검과 심장만이 진실을 알고 있었다.
“…시작이군.”
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어떤 자만심도, 불안감도 아닌, 오직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필연에 대한 담담한 수용이었다. 이제, 유건의 운명은 비무대에 피어오른 붉은 깃발 아래, 격렬한 무림의 파도 속으로 던져질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