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리움 마법학원의 밤은 언제나 깊고 고요했다. 오래된 돌벽에는 달빛이 은은하게 부서져 내렸고, 아득한 복도에는 선배들의 발자취와 위대한 마법사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라온에게 있어 이 모든 숭고함은, 학원 지하에 전해져 내려오는 끔찍한 소문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었다.
“지하 밀실에는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돼, 라온. 그곳은… 학원의 모든 금기가 잠들어 있는 곳이야.”
단짝 친구 릴리아는 언제나 그렇게 경고하곤 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라온의 눈빛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절대로’라는 금기는 오히려 라온의 호기심에 불을 지피는 연료가 되었다. 특히 최근, 학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기록은 그의 발걸음을 지하로 이끌었다.
“아벨리움의 진정한 힘은, 시간을 엮는 비의에 있다.”
누군가의 손글씨로 흐릿하게 쓰여 있던 그 문구는, 그저 전설처럼 떠돌던 ‘시간 마법’에 대한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아무도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금기의 영역. 그리고 그 비의가 지하에 잠들어 있다는 암시는 라온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낡은 지도와 고문서들을 파헤친 끝에, 라온은 마침내 지하로 향하는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 평소에는 그저 낡은 벽난로로 위장되어 있던 곳. 묵직한 돌문을 밀어내자, 훅 하고 퀴퀴하고 차가운 공기가 라온의 얼굴을 때렸다. 습기와 먼지, 그리고 희미하게 풍겨오는 기이한 마력의 잔향이 코끝을 스쳤다.
“젠장, 진짜였잖아.”
라온은 중얼거렸다. 손에 든 마력등의 희미한 불빛이 좁고 구불거리는 통로를 겨우 비췄다. 발밑에는 이름 모를 물체가 밟히는 소리가 났다. 돌계단을 한참이나 내려갔을까. 통로는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거대한 공간과 연결되었다.
그곳은 압도적인 규모의 원형 홀이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었는데, 제단의 표면에는 복잡하고 섬뜩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들은 희미한 보랏빛으로 맥동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쿵, 쿵, 하고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라온의 심장을 조여왔다.
제단 위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수정 구슬이 띄워져 있었다. 투명해야 할 수정은 탁하고 혼탁했으며, 그 안에는 수천, 수만 개의 희미한 그림자들이 춤추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이따금 사람의 형상을 띠거나, 기이한 괴물의 형상을 띠기도 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이 하나같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라온은 자신의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게… 대체 뭐야?”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함에 라온은 마력등을 든 손을 덜덜 떨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어둠의 마법 유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대한 수정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섬광은 공간 전체를 기이한 아지랑이로 물들였다.
라온은 마치 홀린 듯 제단에 다가갔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바닥의 룬 문양이 희미하게 발광하며 섬뜩한 기운을 뿜어냈다. 제단에 거의 다다랐을 때, 라온의 발이 미끄러졌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던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제단의 한 부분을 짚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 대신, 손끝에 닿은 것은 격렬하게 맥동하는 보랏빛 룬 문양이었다.
그 순간, 거대한 수정 구슬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라온은 비명과 함께 몸이 공중으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고, 사지를 짓누르는 압력에 뼈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시야는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수천 개의 그림자가 그를 에워싸고 속삭이는 듯했다. ‘가지 마’, ‘돌아와’, ‘멈춰!’
정신을 차렸을 때, 라온은 제단 앞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주변은 조금 전과 달랐다. 퀴퀴한 먼지 냄새는 온데간데없고,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에서 은은한 허브 향이 감돌았다. 제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위에 띄워진 수정 구슬은 훨씬 더 맑고 투명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떤 그림자도 없었다. 대신, 찬란한 황금빛 마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주변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모두 아벨리움 학원의 최고위 마법사들이 입는다는 오래된 양식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심각했고, 시선은 제단 위의 수정 구슬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간 역류 의식이 시작된 지 벌써 열두 시간.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습니다.”
나이 지긋한 마법사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옆에 선 다른 마법사는 불안한 듯 침을 삼켰다.
“엘리오스 학장님, 과연 이 방법뿐입니까? 미래의 시간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것은… 너무나 큰 금기입니다.”
라온은 숨을 들이켰다. 엘리오스 학장! 아벨리움의 창립자이자 역대 가장 위대한 마법사로 칭송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학원 어딘가에 걸려 있는 초상화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 위엄 있고 냉철한 표정으로 제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오스 학장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꿰뚫는 듯했다.
“다른 방법이 있겠나? 다가올 대재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학원의 미래, 아니 이 대륙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만 해.”
“하지만 그 희생은… 미래의 가능성들을 송두리째 찢어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옆에 있던 마법사가 흐느끼듯 말했다. 라온은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미래의 가능성들’. 바로 그가 조금 전 보았던, 수정 구슬 안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그림자들이었다. 끔찍한 진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벨리움의 영광은, 미래의 알 수 없는 존재들의 생명 에너지를, 시간을 통째로 뽑아내어 이룩된 것이었단 말인가?
엘리오스 학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다. 내게 들리는 것은 오직 아벨리움의 영원한 번영을 위한 염원뿐. 자, 마지막 룬을 새겨 넣어라.”
학장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일제히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들의 지팡이 끝에서 보랏빛과 황금빛이 뒤섞인 마력이 뿜어져 나왔고, 제단 위의 수정 구슬로 빨려 들어갔다. 수정 구슬은 마치 분노한 태양처럼 격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라온은 강력한 힘에 의해 다시금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마법사들이 그를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 미래에서 온 자인가? 시간의 결을 흐트러뜨릴 셈이냐!”
엘리오스 학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눈빛은 라온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학장의 손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왔고, 라온은 그 마력의 폭풍에 휩쓸렸다.
세상이 다시 뒤틀렸다. 보랏빛 섬광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수많은 비명 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라온은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뼈가 제자리를 벗어나는 듯한 고통이 이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익숙한 지하 홀의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력등은 저만치 굴러떨어져 있었고, 제단의 수정 구슬은 여전히 탁하고 혼탁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수많은 그림자들이 가득했다. 그의 손이 닿았던 룬 문양은 다시 차갑고 묵직한 돌로 변해 있었다.
라온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그는 방금 전, 아벨리움의 가장 끔찍한 금기와 마주한 것이었다. 학원의 영광스러운 역사 뒤에 숨겨진, 미래를 희생하여 현재를 유지하는 잔혹한 진실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천천히 마력등을 주워 들었다. 마력등의 희미한 불빛은 이제 홀의 어둠을 걷어내는 대신, 어둠 속에 숨겨진 끔찍한 비밀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듯했다. 라온은 학원의 복도로 향하는 비밀 통로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 모든 영광스러운 건물들, 숭고한 마법사들의 초상화들, 고대 유물들이 가득한 도서관. 그 모든 것이 수많은 ‘가능성’들의 비명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라온은 몸서리쳤다. 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이제, 그는 이 끔찍한 진실을 알고 있다.
아벨리움 학원의 밤은 여전히 깊고 고요했다. 그러나 라온에게 있어, 이 고요함은 더 이상 평화롭지 않았다. 그것은 수많은 미래의 영혼들이 절규하는, 소리 없는 비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비밀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알 수 없는 질문만이 그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