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22화

하얀 침묵 속으로

수아는 창밖으로 스치는 하얀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차는 낡은 필름처럼 겨울 산을 휘감고 돌아 익숙한 듯 낯선 풍경 속으로 그녀를 데려다 놓았다. 창틀에 맺힌 성에꽃 위로 어슴푸레 비치는 햇살은 오래된 기억의 먼지를 걷어내듯 반짝였다.
여기는 바로 그곳이었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눈부셨고, 가장 쓰라렸던 약속이 시작된 곳.

벌써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수많은 계절을 견뎌냈고, 수많은 밤을 그리움으로 지새웠다. 하지만 그 어떤 시간도, 그 어떤 공간도 그날의 맹세를 잊게 할 수는 없었다.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 얼어붙은 강물 앞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영원을 약속했던 그 순간을.

기차가 멈추고,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폐부까지 시린 겨울 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낯익은 듯 낯선 역 풍경. 오래된 간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낡은 시계탑은 변함없이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때와 같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아마도 그녀 자신일 터였다.

옛 추억의 그림자

수아는 짐을 끌고 역을 빠져나왔다. 마을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고요했다. 아침부터 내린 눈은 골목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고, 지붕 위에는 두꺼운 눈 이불이 포근하게 덮여 있었다. 발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눈 위를 걷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과거로 통하는 길을 걷는 듯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옛사랑 카페’였다. 작은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오래된 목조 건물. 그곳은 언제나 그들의 아지트였고, 할머니의 온정이 가득한 곳이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소한 커피 향과 따뜻한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카운터 뒤편에서 백발의 할머니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수아야… 네가 어떻게 여기에…”

할머니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십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할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변함없는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수아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삼키며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할머니는 말없이 수아를 안아주었다. 오랜 시간 동안 묵혀두었던 서러움과 그리움이 터져 나오려는 듯, 수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이고,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웬일이니… 지훈이 때문이니?”

수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이는… 잘 지내요?”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잘 지낸다고는 못하지. 네가 떠난 후로 아이가… 많이 달라졌어.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살았지. 그래도… 그래도 늘 그 자리에 있었단다. 너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수아의 가슴이 미어져 왔다. 그녀는 지훈이 자신을 미워할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그 이유를, 그는 모를 테니까. “아직도… 그 벤치에 가나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오거나, 외로운 날이면 늘 거기서 한참을 앉아 있다 가곤 했지. 그게 벌써 십 년째야. 너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처럼.”

얼어붙은 강가에서

카페를 나선 수아는 눈발이 더욱 굵어진 것을 느꼈다.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서둘러 얼어붙은 강가로 향했다. 눈이 쌓인 강변 길은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발자국 없는 하얀 눈밭을 헤치며 걷는 그녀의 숨결은 뿌옇게 서리꽃을 만들었다.

저 멀리,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 덩그러니 놓인 낡은 나무 벤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벤치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눈을 맞으며, 강물을 응시한 채 미동도 없이.
수아의 심장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동시에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길어진 그림자는 십 년 전 그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뒷모습만으로도 그가 지훈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수아는 망설였다. 이대로 다가가야 할까. 아니, 그가 자신을 알아볼까. 십 년이라는 시간은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갔다. 자신이 그에게 남긴 상처가 너무 깊어,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그날처럼.
수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각거리는 눈 밟는 소리가 고요한 강변에 울려 퍼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지훈의 눈빛은 한없이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놀라움, 혼란, 그리고 깊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그림자가 현실로 나타난 듯한 표정이었다.
수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훈아…”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십 년의 침묵과,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만이 존재했다.

차가운 눈발이 계속해서 두 사람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그들의 오랜 기다림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려는 듯, 혹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려는 듯.

수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강렬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마주할 것이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 진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