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13분. 창밖은 검푸른 하늘 아래 도시의 불빛들이 드문드문 박힌 채 침묵하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의 13층, 김지혁의 작은 원룸은 차갑고 정적인 공기로 가득했다. 노트북 화면의 푸른빛이 그의 피곤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몇 자를 더 타이핑하고는 길게 하품하며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마감 기한에 쫓겨 밤샘 작업을 한 탓에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젠장, 겨우 끝났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목덜미가 뻐근했다. 찬물이라도 한 잔 마실 요량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위에는 어젯밤 마시고 씻어둔 머그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이 잔이 식탁 위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피곤해서 헷갈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가끔 건망증이 심해질 때가 있었다. 컵에 물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얼음물처럼 차가운 물줄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온몸의 피로가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물을 마시고 빈 컵을 다시 싱크대에 놓으려는데, 이번에는 거실 쪽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지혁은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작은 협탁 위에 놓여 있던 탁상시계였다. 평소에는 그 자리에 얌전히 있던 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유리면은 금이 가 있었고, 시침과 분침은 제멋대로 꺾여 있었다.
지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창문을 열어둔 것도 아니었다. 바람이 불어 떨어질 리도 없었다. 그는 시계를 주워 들었다. 멀쩡했던 시계는 이제 고장 나 있었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한데.’
왠지 모를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은 새벽 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다시 시계를 놓았던 자리, 협탁을 쳐다봤다. 순간, 협탁 위 먼지 쌓인 표면에 희미한 손자국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시계를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지혁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이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잠이나 자야겠다 생각하며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한번 깨진 평온함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귓가에는 정적만이 가득했지만, 그 정적은 마치 무언가가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젠장…”
뒤척이며 겨우 잠이 들었을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눈을 뜨자, 어둠 속에서 문고리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려지고 있었다.
딸깍-
잠겨 있던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틈새로 거실의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지혁은 숨을 멈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분명 문을 잠그고 잤다. 항상 잠그고 잤다.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문은 활짝 열린 채, 검은 심연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도둑인가? 아니, 도둑이라면 저렇게 요란하게 문을 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불은 왜 켜져 있지?’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침대에서 발을 디딜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숨죽여 문을 노려보고 있는데, 거실에서 다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거실 불이 꺼지는 소리였다.
지혁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이제 거실은 완벽한 암흑이었다. 그의 방 안으로 검은 어둠이 침범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제발 꿈이기를, 악몽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자 전날 밤의 공포가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확인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꿈이 아니었어…’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젯밤의 공포는 햇빛과 함께 희미해진 듯했다.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처럼 출근을 준비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몸이 굳어버렸다.
냉장고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어제 가지런히 정리해둔 반찬통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우유팩은 찌그러져 내용물이 새고 있었다. 그릇들이 깨진 파편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그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건 명백히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었다. 그는 급하게 휴대폰을 들고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잠시 멈칫했다. 도둑이라면 왜 값나가는 물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냉장고만 엉망으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들어왔지?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현관문은 분명 안에서 잠겨 있었다. 어젯밤 문이 열렸을 때에도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 현관문 잠금장치와 도어록을 확인했다. 멀쩡했다.
그때, 거실에서 작은 ‘쨍그랑’ 소리가 들렸다. 지혁은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거실로 향했다. 거실 중앙, 테이블 위에는 그가 아끼던 작은 유리 공예품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공예품은 테이블에서 떨어져 바닥에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리고 그 파편들 사이로, 작은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지혁은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단정한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직도 몰라? 나는 여기 있어. 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그러나 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에.’
메모지를 읽는 순간, 지혁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고, 마치 얼음물 속에 던져진 것처럼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그의 아파트. 익숙했던 공간이 갑자기 낯설고 위협적인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이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거기… 누구 있어?”
그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낯선 공간에 던져진 아이의 울음처럼 가늘고 떨렸다. 침묵. 텅 빈 공간에 그의 목소리만이 맴돌다 사라졌다.
그때, 등 뒤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지혁은 비명을 지르며 휙 돌아섰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거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가 기울어져 있었고, 그 액자 뒤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어린 시절의 지혁이 낯선 여자아이와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지혁은 그 아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진이 언제부터 저 액자 뒤에 숨겨져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은 공포와 혼란으로 가득 차, 마치 심장이 멈춘 듯 굳어버렸다.
아파트의 모든 것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악…!”
그의 비명 소리가 텅 빈 아파트에 메아리쳤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평범한 일상은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그 알 수 없는 존재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곁에 있었다는 섬뜩한 가능성만이 그를 짓눌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