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먼지 쌓인 마법 상점과 불청객

“젠장, 젠장, 젠장!”

내 손에 들린 스케치북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빈 페이지 위에서 손가락만 맴돌 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감은 내일모레인데, 머릿속은 온통 백지장이다. 내가 예술을 한다고 까불지 말았어야 했다. 이러다 조만간 길바닥에 나앉아 구걸이나 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깨가 축 처졌다.

“야, 두부. 네가 나보다 낫다. 넌 적어도 털갈이는 열심히 하잖아.”

털 뭉치를 뒹굴거리며 팔자 좋게 잠들어 있는 고양이, 두부를 발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두부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답답한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럴 땐 역시 걷는 게 최고다.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아스팔트 위에서 아른거렸다. 익숙한 골목을 벗어나 걷고 또 걷다 보니, 내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동네에 와 있었다. 낡은 상가들이 늘어선 조용한 골목. 그중 유독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다.

‘시간이 멈춘 골동품 가게’라는 낡은 간판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작은 상점. 가게 안은 어두침침했고, 유리창 너머로 먼지 쌓인 온갖 잡동사니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왠지 모르게 발길이 그곳으로 향했다.

“어서 와, 아가씨. 뭐 찾는 거라도 있나?”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달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가 돋보기안경 너머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구경 좀 해도 될까요?”

“암, 그럼 그럼. 편하게 둘러봐. 여기 있는 물건들은 다 주인을 기다리는 몸들이니.”

가게 안은 정말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고풍스러운 시계, 빛바랜 사진첩, 어딘가 고장 난 오르골, 정체를 알 수 없는 석상까지. 발 디딜 틈도 없이 쌓여 있는 물건들 사이를 헤치며 걷다 보니, 내 눈길을 사로잡는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올 만한 크기의 나무 상자였다. 겉은 닳고 닳아 윤기가 사라졌지만, 상자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은 섬세하고 기묘했다. 어디선가 본 듯하면서도 전혀 익숙지 않은, 마치 고대 문자를 연상시키는 신비로운 문양들이었다. 무심코 손을 뻗어 상자를 만졌다.

차가울 거라 생각했던 나무 상자는 의외로 따뜻했다. 손바닥에 닿는 온기가 묘하게 편안했다. 상자에서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기분 탓이겠지.

“이거… 얼마예요?”

나는 상자를 들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돋보기를 치켜세우고 상자를 들여다봤다.

“오호, 아가씨가 이걸 고르다니. 귀신같이 알아봤구먼. 이 상자는… 그래. 딱 오천 원만 내. 내가 아가씨한테만 특별히 싸게 주는 거야.”

오천 원? 이렇게 정교한 상자가? 나는 의아했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지갑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상자를 품에 안고 가게를 나섰다. 퀴퀴한 냄새 대신 달콤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이 상자 덕분일까?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되는 것 같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두부가 킁킁거리며 상자 냄새를 맡더니, 평소답지 않게 앞발로 톡톡 건드려봤다. 그러더니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상자 곁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가르릉거렸다.

“이 상자가 그렇게 좋냐, 두부야?”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뚜껑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돌려보고 밀어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망가뜨릴까 봐 조심조심 다뤘는데, 이렇게 굳게 닫혀 있다니.

“쳇, 보물상자인 줄 알았더니 그냥 장식품인가.”

실망한 나는 상자를 책상 위에 툭 던졌다. 그 순간, 상자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며 작은 충격음과 함께 미끄러졌다. 그리고…

*반짝!*

아주 짧은 섬광이 내 눈앞을 스쳤다. 동시에,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내 마른 물감들이 뿅 하고 공중에 솟구쳤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아주 짧은 순간 무중력 상태가 된 것처럼.

“뭐… 뭐지?”

내가 눈을 비비는 사이, 이번에는 두부가 ‘야옹!’ 하고 크게 울더니, 갑자기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천장까지는 아니었지만, 내 눈높이까지 두부가 붕 떠오른 것이다. 두부는 당황한 듯 허우적거렸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부야! 너 왜 이래?! 이 내려와!”

그때, 상자에서 또 한 번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두부는 스르륵, 원래 있던 자리로 내려앉았다. 두부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듯, 한참 동안 상자를 경계하듯 노려봤다.

“하아…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나 보다. 미쳤지, 미쳤어.”

나는 고개를 흔들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물감이 솟구치고 고양이가 떠오르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역시 마감 압박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구나. 나는 상자를 서랍 안에 넣어버렸다. 내일 아침에 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한 나무 상자로 돌아와 있을 거야.

그때였다.

*쿵! 쿵! 쿵!*

갑작스럽고 격렬한 노크 소리가 문을 두드렸다. 너무나 강해서 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누구지? 이 시간에? 택배도 안 시켰는데.

“누구세요?!”

내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노크 소리는 멈췄지만, 문 너머에서 차분하면서도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지아 씨 댁이 맞습니까? 안에 계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젠장. 설마 내가 돈 빌린 적 없는 빚쟁이인가? 아니면 층간 소음 항의?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이렇게 무섭게 노크하는 사람이 없는데. 나는 문에 바싹 귀를 대고 숨죽여 들었다.

“김지아 씨. 부디 지금 당장 문을 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굳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부순다고? 이 사람 미쳤나?! 나는 잔뜩 겁을 먹은 채 문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프라이팬을 들고.

문이 열리고, 그와 마주한 순간, 나는 숨을 헙 들이켰다.

문을 열자마자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현실이 아닌 듯했다. 조각 같은 미모. 완벽한 비율의 키. 새까만 수트에 칼같이 다듬어진 헤어스타일. 마치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나를 꿰뚫어 볼 듯했다.

“김지아 씨, 맞습니까?”

남자는 내가 들고 있는 프라이팬을 힐끗 보더니,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가진, 그 고대 유물을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네? 고대 유물이라니…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거죠? 그리고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이 뻔뻔한 남자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갑자기 찾아와서 고대 유물이라니, 사기꾼인가? 다단계인가?

“헛소리라니. 당신이 오늘 ‘시간이 멈춘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한, 작은 나무 상자 말입니다. 그거, 제게 돌려주십시오. 그건 당신이 함부로 소유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남자의 말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내가 오늘 산 나무 상자를 어떻게 아는 거지? 설마 이 가게 주인이랑 한 패인가? 나는 잔뜩 경계하며 그를 노려봤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해요? 제가 제 돈 주고 산 건데요!”

“근거요? 지금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미약하지만 확실한 마력의 흔적. 그게 제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 상자가 당신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보셨을 텐데요?”

마력? 통제를 벗어난다? 나는 아까 물감과 두부의 일을 떠올렸다. 설마… 그게 그 상자 때문이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남자는 성큼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문을 가로막았다. 프라이팬을 든 채로.

“들어오지 마세요! 당장 돌아가세요, 아니면 경찰 부를 거예요!”

남자는 나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프라이팬을 휙 하고 빼앗아 제자리에 세워두었다. 그의 손에 잡힌 팔에서,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설픈 저항은 시간 낭비입니다, 김지아 씨. 제 목적은 오직 그 상자뿐입니다. 그걸 제가 회수할 수 있게 협조해주시면, 당신도 무사할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나무 상자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콰앙!*

방 안의 모든 전등이 번쩍이더니, 일제히 터져버렸다. 동시에,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방 안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내가 아닌 상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이런… 벌써 각성이 시작되었나? 김지아 씨, 당신 대체 그 상자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어둠 속에 홀로 빛나는 나무 상자. 그리고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다그치는 남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망했다. 정말 단단히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