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얄팍한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고즈넉한 도서관 한 구석을 비췄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먼지 섞인 마법약 냄새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아늑한 공간. 유진은 고양이 자세로 엉덩이를 들썩이며 저 아래 구석에 엎드린 친구를 쿡쿡 찔렀다.
“하엘아, 너 또 거기서 잠들어? 마법 이론 강의는 그렇게 지루했어?”
“음냐… 으음… 유진아?”
꾸벅꾸벅 졸던 하엘은 번쩍 눈을 뜨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에메랄드색 머리카락은 언제나 제멋대로 삐죽거렸다.
“아, 망했다. 교수님이 또 내 이름 부르셨지? 오늘은 시온이가 옆에 없어서 큰일이었네.”
하엘이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항상 하엘의 옆자리를 지키며 그가 졸 때마다 몰래 깨워주던 시온은 오늘 도서관 지하 서고에 무슨 고문서를 찾으러 갔다고 했다. 세르파이나 마법 학원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고고학 마법’ 과목의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였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하엘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게, 누가 맨날 밤새도록 마법 시뮬레이션 게임만 하래? 너 이러다 졸업 유급당해.”
“걱정 마! 나 천재잖아? 마지막에 몰아서 하면 다 돼!”
하엘이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그의 눈 밑에 드리운 다크서클은 그 말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덜컹! 쿵!
묵직한 진동과 함께 도서관의 낡은 서가들이 살짝 흔들렸다. 탁자 위의 잉크병이 덜컹거렸고, 펜 끝이 책상 위를 미끄러졌다.
유진과 하엘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방금 뭐야? 지진인가?” 하엘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아니… 지진은 아닌 것 같아. 진동이 너무 짧았어.”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서관 중앙, 정확히는 지하 서고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왠지 모르게 싸늘한 기운이 올라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세르파이나 학원은 거대한 마법 에너지를 기반으로 지어졌기에 웬만한 외부 충격에는 끄떡없었다. 이런 진동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 시온이 지하 서고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유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하엘의 얼굴도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야,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서관 관리인은 하릴없이 졸고 있었다. 그들은 인기척 없이 서둘러 지하 서고로 통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은 어둡고 축축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오래된 곰팡이 냄새와 알 수 없는 쇠붙이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진짜 이상한데. 이 냄새는 또 뭐야?” 하엘이 코를 움켜쥐었다.
“지하 서고는 원래 좀 음습하잖아… 그래도 오늘따라 더 심한 것 같긴 해.”
유진의 발걸음이 망설여졌다. 학년 초 오리엔테이션에서 ‘지하 서고 깊숙한 곳의 일부 구역은 절대 출입 금지’라는 경고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단순히 ‘금지 구역’이라고만 했을 뿐, 왜 금지되었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위험하다’는 막연한 경고만이 있을 뿐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낡은 나무 문이 나타났다. 육중한 문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빽빽하게 들어선 서가들과 책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먼지가 내려앉은 통로 사이로 희미하게 마법 램프가 빛을 내고 있었다.
“시온아! 시온! 너 여기 있어?” 유진이 조심스럽게 외쳤다.
“시온! 괜찮아? 방금 진동 못 느꼈어?” 하엘도 뒤따라 목소리를 높였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저 안쪽 깊숙한 곳에서 흐느끼는 듯한, 혹은 긁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려 안간힘을 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유진과 하엘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발소리를 죽인 채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낡은 서가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자, 이내 한쪽 벽면에 걸린 낡은 태피스트리가 보였다.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태피스트리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형체들이 무언가를 에워싸고 있는 듯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저거… 분명 예전엔 없었던 것 같은데?” 하엘이 웅얼거렸다.
“설마… 금지 구역 쪽인가?” 유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피스트리 뒤에서 진동과 함께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단순한 흐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힘이 봉인된 문을 두드리는 듯한, 둔탁하고 압도적인 울림이었다.
“시온아!”
유진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그녀는 태피스트리를 확 걷어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태피스트리 뒤에는 예상대로 낡은 벽이 있었다. 하지만 그 벽은 평범한 돌벽이 아니었다. 거대한 마법진이 벽 전체에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오묘한 빛을 내는 마법진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마법진 한가운데, 시온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손에는 고대 문자가 새겨진 낡은 양피지 한 장이 쥐여 있었다.
“시온!”
하엘이 급히 달려가 시온을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유진은 하엘의 팔을 잡아챘다.
“하엘아, 멈춰! 이 마법진… 뭔가 이상해!”
유진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마법진은 그저 봉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진이 뿜어내는 기운은 차갑고 암울했지만, 동시에 묘하게 애처로운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벽 안쪽에서 다시 한번 쿵! 하는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더욱 강렬했다. 마법진의 빛이 번뜩이더니, 시온이 들고 있던 양피지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양피지 위 고대 문자들이 살아 움직이듯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벽 안쪽에서 아련하고 슬픈 여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잊혀진 이여… 잠들지 못하는 이여… 영원한 속박에서… 깨어나소서…”
노랫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동시에 너무나 비통해서 유진과 하엘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것은 이 학원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가 단순한 괴물이나 마법적 재앙이 아님을,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슬픈 사연을 품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온의 손에 들린 양피지가 활활 타오르며 마법진의 빛과 섞여들었다. 노랫소리는 더욱 커지고, 벽 안쪽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마치 거대한 슬픔의 파도처럼 유진과 하엘을 덮쳐왔다.
“이게 대체… 뭐야…?” 하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진은 홀린 듯 벽의 마법진을 바라봤다. 그 차가운 빛 속에서, 그녀는 언뜻 한 줄기 눈물 같은 것이 흐르는 환영을 본 것 같았다.
세르파이나 마법 학원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는, 어쩌면 학원의 영광스러운 역사만큼이나 오래되고 슬픈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지금, 시온의 실수로 인해 깨어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