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헤르메스호의 함교는 죽은 듯 고요했다. 광활한 우주가 품은 침묵이 유리창 너머로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 모든 소리가 진공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시리도록 차가운 별들의 바다, 그 끝없는 어둠 속을 헤르메스호는 홀로 유영하고 있었다. 인류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쏘아 올린 개척선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무색하게, 현실은 무한한 고독과 한 줌의 자원만으로 버텨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현 부함장은 캡슐형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무감각하게 모니터를 응시했다. 재활용된 영양 페이스트의 밍밍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몇 년째 이어지는 이 지루하고도 불안한 항해에서, 그의 감각은 이미 대부분 마비된 상태였다. 망망대해의 작은 조약돌처럼 홀로 떠도는 기분, 그것이 바로 이현의 일상이었다.

“부함장님, 장거리 스캐너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습니다.”

정적을 깬 건 보조 오퍼레이터의 건조한 목소리였다. 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스캐너가 고장 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수없이 많은 우주 먼지나 미세 운석 조각, 혹은 알 수 없는 전자기파 교란이었겠지. 이곳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예측된, 인류의 손길이 단 한 번도 닿지 않은 심우주였다.

“수치 확인해 봐.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아닙니다. 반복해서 스캔 중인데, 신호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우주 현상은 아닙니다.”

모니터는 여전히 검은 우주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좌측 하단의 작은 창에는 희미한 점이 깜빡이고 있었다. 이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걸음이 금속 바닥에 울리는 소리조차 주변의 침묵을 깨뜨리는 듯했다.

“서연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함교로 오라고 해.”

박서연, 그녀는 헤르메스호의 유능한 과학 장교였다. 우주 과학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졌지만, 그만큼 깐깐하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녀가 ‘일반적인 우주 현상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면, 정말 뭔가 있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연이 허둥지둥 함교로 들어섰다.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충혈된 눈은 방금까지도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부함장님, 무슨 일입니까? 설마… 비상 상황은 아니겠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짝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작은 변화조차도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장거리 스캐너에 잡힌 신호 좀 봐봐.”

서연은 이현의 옆에 서서 모니터를 응시했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고 미간이 깊게 파였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오가며 스캔 데이터를 재차 분석했다.

“이건… 자연 현상이 아니에요. 인위적인 신호, 혹은… 아주 거대한 물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흥분과 함께, 경외심이 섞여 있었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학자적 호기심이 그녀의 두려움을 잠시나마 덮어버린 것이다.

“크기는 어느 정도인데?” 이현이 물었다.

서연은 다시 몇 번의 키를 두드린 후 화면에 나타난 수치를 읊었다. “최소 지름 500km 이상… 아니, 이건 말이 안 돼요. 행성급 크기입니다. 그런데… 질량은 거의 측정되지 않습니다. 에너지는 방출하지 않으면서, 주변 공간을 미묘하게 뒤틀고 있어요.”

“행성급 크기인데 질량이 없다고? 그럼 홀로그램이라도 된다는 건가?” 이현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역력했다.

“아니요. 홀로그램이라기엔… 너무나 견고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이 우주의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여요. 함장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혁 함장은 헤르메스호의 정신적 지주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그의 판단은 모두에게 신뢰를 주었다.

함장실로 연결된 통신이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연결되었다.

“김준혁입니다.”

나직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함장님, 이현 부함장입니다. 심우주 스캔 중, 미지의 거대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서연 박사의 분석 결과, 자연 현상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주선 내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위치 전송하고, 최고 경계 태세 발령해. 그리고… 항로를 물체 방향으로 돌려. 속도는 최대로.”

김준혁 함장의 명령은 단호했다. 위험할 수도 있는 미지의 존재를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가겠다는 결단. 이는 헤르메스호에 탑승한 모든 이들의 오랜 염원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돌아가는 것보다는, 미지의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쩌면, 인류를 구원할 단서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헤르메스호의 거대한 엔진이 굉음을 내며 깨어났다. 잠잠했던 함선 전체가 미세한 진동과 함께 거대한 존재를 향해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창밖의 별들이 점차 길게 늘어지는 빛줄기로 변해갔다.

— 몇 시간 후 —

수천, 수만 킬로미터를 뚫고 전진한 끝에, 마침내 그들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검은색. 아니, 검은색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절대적인 어둠. 그것은 마치 우주 공간 자체를 도려내어 응축해 놓은 듯한 거대한 그림자였다. 아무리 고성능 센서를 들이대도 그 표면은 제대로 측정되지 않았다. 다만 그 존재 자체가 시각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함장님, 육안으로 확인됩니다. 저것이… 저희가 찾던 물체인 것 같습니다.” 서연의 목소리는 떨렸다.

김준혁 함장은 함장석에 앉아 고해상도 메인 스크린에 투영된 물체를 응시했다. 그것은 육면체도 구형도 아닌, 어떤 기하학적인 형태도 규정할 수 없는 기괴한 형상이었다. 표면은 마치 거대한 암석처럼 울퉁불퉁했지만, 동시에 액체처럼 끊임없이 일렁이는 듯했다.

“최민준 엔지니어, 함선 시스템에 이상은 없나?” 함장이 물었다.

최민준은 관제석에서 연신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함장님, 사소한 전자기 교란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외부 스캐너의 데이터가 자꾸 손상되네요. 하지만 생명 유지 장치나 항해 시스템에는 아직 영향 없습니다.”

“의료 장교 정은아, 선원들 생체 신호는?”

의료 장교 정은아가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답했다.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다만 몇몇 선원들이 두통과 가벼운 메스꺼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마… 미지의 전자기파나 저 물체에서 오는 정신적 압박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신적 압박이라고?” 김준혁 함장은 눈썹을 치켜떴다.

“네. 과학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저 물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는 이에게 일종의 위압감을 주고 있습니다. 제 생체 신호도 살짝 불안정합니다.”

그때였다. 물체 주변의 공간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동은 헤르메스호 내부까지 전해져 왔다. 함선 전체가 낮고 깊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건… 공명입니다!” 서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 물체에서 특정 주파수의 진동이 방출되고 있어요. 우리 함선의 공진 주파수와 겹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함선 구조에 무리가 갈 겁니다!”

“접근 속도 줄여! 최대 출력으로 역추진 엔진 가동!” 김준혁 함장이 소리쳤다.

최민준은 필사적으로 조종간을 당기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헤르메스호는 이미 거대한 물체의 중력장—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힘—에 사로잡힌 듯했다. 역추진 엔진이 맹렬히 불을 뿜었지만, 함선은 오히려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 검은 물체를 향해 끌려가고 있었다.

“함장님! 역추진이 먹히지 않습니다! 출력은 최대로 나오는데, 함선 속도가 줄어들지 않아요!” 최민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때, 거대한 검은 물체의 표면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현 부함장은 눈을 크게 떴다. 액체처럼 일렁이던 표면이 점차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정교하고 복잡한 문양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어떤 문자의 형태를 띠고 있는 듯도 했고, 동시에 거대한 회로도 같기도 했다. 그 문양들 사이에서 섬광처럼 강렬한 빛이 pulsing하며 번뜩였다.

“이건… 데이터에요! 저 물체가 뭔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서연이 흥분과 공포가 뒤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눈은 이미 그 기이한 문양에 홀린 듯 고정되어 있었다.

모니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알 수 없는 기호와 그래프들이 폭주했고, 경고음이 함교를 가득 메웠다.

‘삐이이이이익-!!’

“함장님! 외부 센서가 망가지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에너지파가 저희를 덮치고 있어요!” 최민준이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검은 물체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헤르메스호 전체를 감쌌다. 섬광은 너무나 강력해서, 승무원들은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함선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작은 조각배처럼 격렬하게 요동쳤다.

“모두 충격에 대비해!” 김준혁 함장의 목소리는 일렁이는 함선 속에서도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헤르메스호의 메인 스크린 전체가 하얗게 타올랐다가 이내 암전되었다. 함교를 감싸던 비상등마저 깜빡이다 꺼졌다.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잠겼다. 외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것은 단 하나, 금속이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비명 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정은아 의료 장교의 무전기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듯한, 혹은 흐느끼는 듯한, 으스스한 음성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이미… 우리 안에…”**

이현은 눈앞의 어둠 속에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미지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이 되어버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