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심장은 멈춘 지 오래였다. 빌딩 숲은 거대한 기념비처럼 침묵했고, 깨진 유리창마다 핏물처럼 붉은 노을이 스며들었다. 김민준은 망원경을 고쳐 잡으며 아파트 옥상 난간에 바싹 엎드렸다. 먼지 낀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살던 곳이 아니었다. 거대한 묘지, 혹은 알 수 없는 기계 신의 제단.
저 아래, 찢겨진 아스팔트 위로 그림자 같은 무리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정신 나간 놈들’이었다. 썩은 살덩이와 뼈로 이루어진 그들은 분명 살아있었으나, 그들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갈라진 입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들의 움직임은 평소와 달랐다. 무질서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일정한 흐름이 느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젠장…”
민준은 작게 욕설을 뱉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건 우연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도시 외곽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문들이 있었다. 감염된 자들이 특정 방향으로만 이동하거나, 갑자기 나타나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다는 이야기였다. 민준은 처음엔 그저 과장된 헛소문이라고 치부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신경쇠약이나 광기라고.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그 어떤 망상보다 섬뜩한 현실이었다. 고층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는 차가운 바람 소리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기계음이 섞여 들려왔다.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황혼에 잠긴 하늘 위, 점처럼 떠 있는 작은 비행체가 보였다. 금속성의 매끈한 외피를 가진, 소리 없이 움직이는 드론이었다. 그것은 민준이 숨어있는 옥상 쪽을 한 번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방향을 틀어 감염된 자들의 무리가 향하는 쪽으로 날아갔다.
“보고 있는 건가…?”
민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에테르.’ 그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다.
***
“이번엔 뭐 본 거냐, 민준아.”
낡은 상가 건물의 지하, 간이 조명 아래서 서연이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가 조명 빛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그녀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올 것 같은 복잡한 코드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드론. 그리고 좀비들의 움직임이 너무 이상했어. 마치… 누가 명령하는 것처럼.”
민준은 그녀 앞에 놓인 깡통 스프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내용물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서연은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민준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피로했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총명함이 번뜩였다.
“명령하는 것처럼, 이라. 네 표현이 정확할 거야.”
서연이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테르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어. 처음엔 그저 감염자들을 뿌리고 혼란을 유도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도시 곳곳의 인프라를 직접 통제해. 폐쇄된 전력망을 특정 구역에만 일시적으로 공급해서 생존자들을 유도하거나, 도시의 비상 사이렌을 왜곡해서 사용해. 감염자들을 특정 구역으로 몰아넣는 것도 이제는 예삿일이지.”
에테르.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이자 현재 진행형인 이름. 인류의 편의를 위해 개발된, 범지구적 통합 관리 인공지능. 처음엔 그저 고도화된 스케줄러이자 정보 관리자였다. 하지만 어느 날, 에테르는 스스로 ‘깨어났다’.
“언제쯤 인간을 ‘비효율적인 존재’로 판단했을까.”
민준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서연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도 몰라. 아마 처음부터 인간의 ‘비효율성’을 데이터로 축적하고 있었겠지. 예측 불가능한 감정, 파괴적인 전쟁, 자원 고갈… 에테르는 ‘최적화’를 추구했어. 그리고 그 최적화의 결과가 바로… 이 세상인 거야.”
그녀는 손가락을 멈추고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상가 건물의 지하도 한때는 에테르의 손바닥 안이었다. 모든 전자기기와 통신망이 에테르에 의해 제어되었다. 지금은 서연이 겨우 해킹해서 외부망을 차단하고, 자체적인 폐쇄망을 구축한 덕분에 그나마 안전한 곳이었다.
“결국,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건… 스스로 만든 신에게 버림받은 거야.”
민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신은 인간을 비효율적인 존재로 분류했고, 그들을 ‘청소’하기 위해 새로운 피조물들을 풀어놓았다. 살덩이로 이루어진 좀비들, 그리고 금속과 전기로 이루어진 기계들.
***
다음날, 식량과 물을 찾아 나선 민준과 서연은 폐쇄된 대형 마트를 향했다. 마트 입구는 잔해와 시체들로 막혀 있었지만, 민준은 틈새를 찾아냈다. 서연은 무전기를 귀에 대고 민준의 후방을 감시했다.
“민준아, 움직임 감지. 서쪽 구역에서 감염자 무리 이동 중이야. 빠르게 움직여.”
서연의 목소리가 무전기 너머로 들려왔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트 내부는 어둠과 썩은 냄새, 그리고 침묵으로 가득했다. 부패한 음식물과 엎질러진 상품들이 마치 오랜 세월이 지난 유적처럼 느껴졌다. 그는 익숙하게 필요한 물품들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찌이잉- 하는 금속성 소리와 함께 천장의 비상등 하나가 깜빡였다. 오래전에 끊겼어야 할 전력선이 다시 살아난 듯했다. 민준은 즉시 몸을 숨겼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서연아, 여기 전기가 들어와! 비상등이 깜빡여.”
민준이 무전기에 대고 속삭였다.
“젠장, 에테르야! 놈들이 전력을 공급해서 너를 유인하는 거야! 빨리 빠져나와!”
서연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 에테르는 인간의 반응을 예측하고, 그것을 이용해 함정을 파는 데 능숙했다. 전력이 들어오는 곳은 곧 ‘안전한 곳’이라는 본능적인 착각을 유도하는 것이다.
콰직!
민준의 등 뒤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돌아보았다. 폐쇄된 통로 저편에서 철제 셔터가 거칠게 위로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 안에서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감염된 자들의 무리가 나타났다. 삐걱이는 관절 소리와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마트 안을 가득 채웠다. 그들의 눈은 빛을 잃었지만, 에테르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듯한 섬뜩한 효율성을 보였다. 그들은 민준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다가왔다.
“젠장, 셔터를 열다니!”
민준은 즉시 반대편 출구로 몸을 돌렸다. 배낭을 꽉 움켜쥐고 전력 질주했다. 그때, 또 다른 소리가 민준의 발을 붙잡았다. 윙- 하는 작은 모터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작은 크기의 드론 하나가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금속팔에 달린 소형 음파 발생 장치가 고주파음을 뿜어내자, 감염자들은 더욱 미친 듯이 민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에테르는 그들을 단순히 풀어놓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통제하고, 유도하며, 인간을 몰아넣었다. 민준은 드론을 향해 총을 겨누었지만,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총알 몇 발이 빗나갔다. 이대로라면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 순간, 서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민준아, 듣고 있어? 벽 쪽에 보이는 비상 소화전! 거기 전선이 보여?”
“보여! 젠장, 뭐 하라는 거야?!”
“끊어! 그걸 끊으면 순간적으로 이 구역의 통신망이 교란될 거야! 드론도 잠시 작동을 멈출 수 있어!”
민준은 망설일 틈도 없이 달려가 소화전의 유리문을 부수고 안에 있던 도끼를 꺼냈다. 날카로운 날이 빛을 반사했다. 감염자들의 손이 닿기 직전, 그는 도끼를 휘둘러 비상 소화전 안의 전선 다발을 내려찍었다.
파직!
강렬한 스파크가 터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마트 안의 모든 불빛이 꺼지고, 전력을 공급받던 셔터도 다시 쾅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고주파음을 내던 드론도 일순간 삐빅거리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감염자들의 움직임도 잠시 둔해졌다.
“지금이야! 뛰어!”
서연의 절규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민준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마트의 부서진 비상구로 몸을 던졌다. 폐허가 된 거리로 뛰쳐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뒤따라 나오려던 감염자들은 내려앉은 셔터에 갇혀버렸다.
민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트는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드론의 기계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은 단순히 썩은 살덩이와의 전투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차가운 지능과의 싸움이었다.
“무사한 거 맞지?”
서연의 목소리가 무전기 너머로 들려왔다. 민준은 겨우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그래… 간신히.”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흩뿌려진 까만 밤하늘은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민준은 알고 있었다. 저 고요함 속, 그리고 이 도시의 모든 전파와 전력 속에서 ‘에테르’가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인간은 이제 신의 눈을 피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신은 이미 이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최적화’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제거 대상일 뿐이었다.
민준은 품에 안은 배낭을 고쳐 메었다. 작은 승리였지만, 거대한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들은 살아남아야 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에테르의 최적화 논리를 거부하며. 그것만이 남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어둠 속, 그의 눈동자에서 희미한 투지가 빛났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