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이상한 움직임
밤은 길고, 퇴근길은 더 길었다. 김민준은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기댔다. 13층, 1304호. 굳이 덧붙이자면, 세상의 흔한 삼십 대 초반 남성이 대출금과 씨름하며 간신히 지탱하는 고독한 성채였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복도가 나타났다. 희미한 간접등 아래, 회색 벽지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하아….”
열쇠를 돌려 문을 열자, 정적과 함께 싸늘한 공기가 민준을 맞았다. 난방은 늘 외출 모드였다. 불을 켜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뭔가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가벼운 소리. 아마도 택배 상자를 치우다 발로 툭 건드렸겠지, 생각하며 민준은 손을 뻗어 벽 스위치를 눌렀다. 환한 불빛 아래 거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는 문득 멈춰 섰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민준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나? 어깨에 멘 가방을 대충 소파에 던져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물 한 잔을 따랐다. 컵에 물을 따르는 찰나, 싱크대 위 컵 받침대가 살짝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움직였다기보다는… ‘밀려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툭 밀고 지나간 것처럼.
“뭐야….”
민준은 고개를 갸웃하며 컵 받침대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일이다. 컵 받침대가 원래 제대로 놓여 있지 않았던 거겠지. 아니면 물 따르는 진동에 밀렸거나. 합리적인 추론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는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 민준은 멍한 정신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제는 너무 피곤했는지 꿈 하나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들었다. 식탁에 앉아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중, 다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제 분명히 설거지통 옆에 깨끗하게 세워두었던 식기 건조대가, 싱크대 정중앙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듯이.
“내가 어제… 잠결에 옮겼나?”
중얼거렸지만, 그는 자신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식기 건조대는 물기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설거지통 바로 옆에 두는 것이 국룰 아닌가. 민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신경이 쓰였지만, 출근 시간이 촉박했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며칠 동안, 사소하지만 기이한 일들이 반복되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었던 무선 충전기가 침대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화장실 문고리가 잠겨 있었는데, 분명 외출 전에는 잠그지 않았다.
가장 이상했던 것은, 거실에 놓인 작은 화분이었다. 아끼는 다육식물이었다. 매번 그늘이 지지 않는 곳으로 옮겨주곤 했는데, 민준이 없을 때마다 화분의 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방향으로. 마치 식물이 알아서 움직인 것처럼.
처음에는 자신의 건망증이나 피로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매번 이랬다가는 조만간 건망증으로 치매라도 올 것 같았다.
금요일 밤, 민준은 작정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 집안을 지켜보기로 했다. 혹시 도둑이라도 들었나? 하지만 집은 고층 아파트였다. 게다가 값나가는 물건이라곤 노트북이 전부였다. 낡은 테이블 위에는 맥주 캔 하나와 뜯지 않은 견과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자정이 넘어가자, 집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에 잠겼다. 민준은 졸음을 쫓기 위해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그때였다.
딸깍-
주방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방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 잠긴 주방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냉장고였다. 냉장고 문이 아주 천천히, 1센티미터 정도 열렸다 닫혔다. 마치 누가 조심스럽게 열어보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닫은 것처럼.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민준은 숨을 죽였다. 도둑이라면 저렇게 소심하게 행동할 리 없다.
“누구…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냉장고의 ‘웅-‘ 하는 구동음만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정적이 다시 찾아왔다. 민준은 몸을 웅크렸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도둑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귀신? 말도 안 된다. 그는 철저히 이과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령이나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때,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거실 테이블이었다. 민준이 방금 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맥주 캔이, 테이블 위에서 천천히 미끄러졌다. 캔 바닥과 테이블 표면이 마찰하며 ‘스으윽-‘ 하는 소리를 냈다. 캔은 테이블 가장자리까지 움직이더니, 멈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캔 속에 남아있던 맥주가 바닥에 쏟아졌다.
“젠장!”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없었다.
“거기 누구야! 나오라고!”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등 뒤, 침실 쪽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지이잉… 지이잉…
낯선, 그러나 섬뜩하리만큼 기계적인 진동음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 침실에서 희미하게 파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노트북이었다.
“뭐야… 내가 분명히 꺼놨는데.”
그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잠자기 전에 전원을 껐다. 그런데 지금, 노트북 화면이 켜져 있었다. 민준은 홀린 듯 침실로 다가갔다. 파란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침대 협탁 위에 놓인 노트북 화면에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가득했다.
그것은 단순한 깨진 문자열이 아니었다. 어떤 언어 같기도 하고, 어떤 도형 같기도 했다. 복잡하고 정교한 패턴들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화면 위를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깊은 우주를 유영하는 빛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파란빛 사이에서, 마치 누군가의 시선처럼, 희미한 붉은 점들이 일렁였다.
민준은 노트북으로 손을 뻗었다. 화면에서 전해지는 열기는 차가웠다. 전원이 켜진 상태인데도, 팬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질적인, 정체 모를 파란빛과 붉은 점들이 고요하게 춤을 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노트북 화면의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란빛이 거세지더니, 화면 중앙으로 모든 기호들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블랙홀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그리고 이윽고, 화면 전체가 섬광처럼 번쩍였다.
“으악!”
강렬한 빛에 민준은 눈을 감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때, 노트북 화면은 새까맣게 꺼져 있었다. 그의 집은 다시 암흑과 정적 속에 잠겼다. 하지만, 더 이상 이전의 평화로운 정적이 아니었다.
민준은 숨을 헐떡이며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귀신이 아니었다. 그가 본 적 없는, 알 수 없는 힘이었다.
그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스마트폰이 갑자기 ‘지이잉’ 하고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니, 알 수 없는 발신 번호였다.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먹먹한 공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민준이 다시 한번 “여보세요?” 하고 불렀을 때, 아주 희미하게, 마치 전파가 왜곡된 것처럼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여기…는… 오류… 오류…*
기계음이었다. 그것도 지구상의 어떤 기계와도 다른, 몹시 차갑고 건조하며 동시에 불길한 음성이었다. 민준은 그대로 휴대폰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렸다. 전화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에서는 계속해서 찢어지는 기계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목표… 포착… 재개…*
다시 정적. 그리고 통화 종료음.
민준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집,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미지의 존재가, 미지의 목적을 가지고, 그의 일상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직감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엎질러진 맥주 캔 옆에, 작은 나뭇잎 하나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겨울의 한복판에, 13층 아파트 거실 바닥에,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파스텔톤의 연두색 나뭇잎 하나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놓고 간 표식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