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장. 균열
강민준은 지루했다. 쨍한 오후 햇살이 연구실 창문을 넘어 끈적하게 달라붙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어제 마저 깨지 못한 모바일 게임의 막판 보스전 생각으로 가득했다. 자료 더미에 파묻힌 컴퓨터 화면에는 의미 없는 그래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고고학 전공 3학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현실에 대한 지독한 권태감 사이에서 그는 늘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아… 오늘도 망했군.”
작게 중얼거리며 민준은 의자를 뒤로 젖혔다. 기지개를 켜자 굳어있던 어깨 근육이 우드득 소리를 냈다. 시계를 보니 퇴근까지 두 시간. 차라리 학교 뒤편에 새로 생긴 낡은 유적지나 구경할까. 어차피 오늘 할당된 작업은 얼추 마무리했고, 교수님은 워낙 자유분방한 분이라 이 정도 일탈은 눈감아 주실 터였다.
결심이 서자 몸이 가벼워졌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민준은 짐을 챙겨 연구실을 나섰다. 바람 한 점 없는 꿉꿉한 공기가 도심의 냄새를 한층 짙게 만들었다. 낡은 유적지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잡초가 무성한 비포장도로를 한참 걸어 올라가자, 이정표도 없이 버려진 작은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배기 위에는 몇 개의 돌기둥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부서진 채 서 있었다.
“와, 진짜 아무것도 없네.”
민준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발길이 끊겼더라니. 겨우 이 정도 유적을 보겠다고 힘겹게 올라온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돌기둥 중 가장 커 보이는 것을 살펴보았다. 글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차가운 돌 표면을 쓸어보았다. 손끝에 닿는 오래된 이끼의 감촉이 이상하게도 생생했다.
바로 그때였다.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쨍하던 햇살은 온데간데없고 먹구름이 순식간에 머리 위를 뒤덮었다. 우르릉, 쾅! 요란한 천둥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민준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름에 흔한 소나기겠지, 생각했지만 불안한 예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번개 한 줄기가 허공을 갈랐다. 섬광이 너무 강렬해 눈을 감았지만, 잔상이 시야에 강하게 박혔다. 그리고 이어진 엄청난 진동. 땅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발버둥 치는 듯한 진동에 몸의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돌기둥에 부딪히며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쿵, 하고 머리를 세게 박자 아찔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새하얘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차가운 돌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었다. 섬광은 점점 거세지더니 이내 온 세상을 뒤덮었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듯한 강력한 중력에 몸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젠장… 이게… 뭐야…!”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 민준은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나는… 죽는 건가?*
***
싸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눈을 뜨자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낡은 나무 천장.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의 생전 보도 듣도 못한 낯선 풍경. 기와지붕이 늘어선 마을, 흙먼지 폴폴 날리는 길거리,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현대의 고층 건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낮고 너른 산세.
“여긴… 어디지?”
민준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 겨우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누워있던 곳은 흙벽으로 지어진 낡은 방이었다. 구석에는 누군가가 쓰다 버린 듯한 낡은 이불과 베개가 뒹굴고 있었고, 흙으로 빚은 듯한 작은 탁자 위에는 낯선 약재들이 놓여 있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자신의 옷이었다. 분명 평소에 입던 청바지와 티셔츠가 아니었다. 옅은 회색의 두꺼운 면포로 만들어진, 낯선 디자인의 옷이 몸에 걸쳐져 있었다. 혹시 누군가 자신을 데려와 병원복 같은 것을 입힌 건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순간, 기억 속으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푸른빛. 그리고 찢어질 듯한 고통.
‘설마… 꿈은 아니겠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나섰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자, 정오의 햇살이 눈을 찔렀다. 눈을 가늘게 뜨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길거리에는 갓을 쓴 남자들과 비단 치마를 두른 여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짚신을 신은 채 낡은 짐수레를 끄는 사람, 등짐을 진 채 시장을 오가는 상인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 낯선 어투의 대화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보시오, 거 참 이상한 양반이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인상을 찌푸린 덩치 큰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기다란 칼이 매달려 있었고, 얼굴에는 험악한 흉터가 길게 나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없어서…”
민준은 본능적으로 사과했지만, 사내는 더욱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정신이 없다니? 이놈 보게, 어디서 온 놈이길래 눈깔을 그렇게 뜨고 지랄이야? 옷차림도 괴상망측하구만.”
험악한 말씨에 민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분명 한국말인데… 어조나 단어 선택이 너무나도 옛스러웠다. 흡사 사극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화였다.
“저… 여기가 어디입니까?”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묻자,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여기가 어디냐니? 쯧쯧, 머리를 어디다 박고 왔는가 보군. 여기가 어디긴 어디야, 백하촌이지! 천하제일 무도회가 열리는 대성산 입구에 있는 백하촌 말이다!”
천하제일 무도회? 민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사극 드라마 촬영 현장인가? 아니, 아무리 봐도 이건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 천하제일 무도회라니요? 혹시 무슨 행사라도 하는 겁니까?”
“행사? 이 미친놈이! 천하의 운명을 가를 대결이 벌어지는 성전인데 행사는 얼어 죽을! 각 문파와 세가의 고수들이 모여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천하쟁패전(天下爭覇戰)이 바로 내일부터 열린다고!”
사내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의 말은 민준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천하의 운명? 천하쟁패전? 문파와 세가?*
이 모든 단어들이 그가 즐겨 읽던 무협지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여기에…”
민준은 더듬거렸다. 사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멱살을 잡았다.
“닥쳐라, 이놈! 어딜 감히 나 사검맹(邪劍盟)의 장문인 밑에서 맹원들을 교육하는 조강(助講)을 맡고 있는 정위(正衛) 나협(羅俠)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여? 천하쟁패전 소식도 모르는 놈이 어찌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나협이라는 사내는 민준의 멱살을 움켜쥔 채 씩씩거렸다. 그의 눈빛은 살기 등등했다. 민준은 숨이 막혀 컥컥거렸다.
“하… 하필… 백하촌이라니…!”
그는 자신의 처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시간 여행을 온 것도 모자라, 하필이면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가 열리는 곳이라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민준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고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협의 거친 손아귀에 붙들린 채, 민준의 눈앞에는 온통 낯선 세계의 풍경이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집으로… 돌아가야 해.*
*하지만… 어떻게?*
새로운 세상의 문이, 강민준 앞에 강제로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 뒤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혼돈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