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강민은 낡은 공구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흐트러진 전선 더미를 힐끗 보았다. 툭하면 끊어지는 이 동네 전기는 그의 주 수입원이었다. 늘상 있는 일이었다.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어둑했지만, 곧 비라도 쏟아질 모양이었다. 그는 땀으로 축축한 이마를 훔치며 숨을 골랐다. 찌직, 하는 스파크 소리와 함께 지지직거리던 전등이 마침내 제 빛을 찾아 깜빡였다.

“휴, 됐다.”

그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벽 한편에 놓여 있던 낡은 궤짝에서 푸른빛이 번쩍 뿜어져 나왔다. 강민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젠장, 뭐야!”

궤짝은 얼마 전 그가 우연히 주워 온 것이었다. 그저 고물상에서 발견한 신기한 장식품이라고 생각했는데, 내부가 복잡한 기계장치로 되어 있어 호기심에 분해해보려던 참이었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온 방을 뒤덮었고, 강민의 몸을 휘감았다. 몸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과 함께 사방이 일그러졌다. 시야는 번개처럼 터지는 섬광에 잠식되었고, 귀는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는 의식을 잃기 직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끔찍한 비명을 들었다. 그것은 자신의 비명이었을지도 모른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목 안을 긁는 듯한 건조한 통증과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먼지 냄새였다. 강민은 콜록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

그는 폐허가 된 도시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방은 무너져 내린 고층 빌딩의 잔해와 녹슨 철근으로 가득했다. 자동차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쇳덩이가 되어 길가에 방치되어 있었고, 도로에는 거대한 균열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뻗어 있었다. 하늘은 뿌연 황갈색 먼지로 뒤덮여 있어 해의 위치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마치 몇백 년은 시간이 흐른 뒤의 세상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를 지배했다. 강민은 허리에 찬 공구 주머니를 확인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공구는 그대로였다. 물통은 비어 있었고, 식량은 없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가장 먼저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았다.

“젠장, 꿈인가? 이런 끔찍한 악몽이 다 있어.”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적막함만이 그의 말을 집어삼켰다. 멀리 떨어진 빌딩의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흩날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번화했을 거리를 지나, 그나마 온전해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는 바깥보다 더 음산했다. 쓰러진 선반, 먼지로 뒤덮인 계산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자국들. 강민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복도 끝, 부서진 철문 뒤에서 희미하게 깜빡이는 불빛을 발견했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직감과 함께, 무언가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교차했다.

철문을 밀자 삐걱이는 굉음이 주위를 갈랐다. 안쪽은 암흑 그 자체였지만, 깜빡이던 불빛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는 스마트폰의 손전등 기능을 켜고 조심스럽게 빛을 비췄다. 낡은 컴퓨터 서버실 같았다. 그리고 그 불빛은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단말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단말기 옆에는 녹슨 드론 한 대가 엎어져 있었다.

“이게 뭐야….”

강민은 드론을 들어 올렸다. 예상외로 가벼웠다. 드론의 몸체는 여러 곳이 찌그러져 있었지만, 중앙에 박힌 렌즈는 그를 향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원 버튼을 눌렀다. 웅, 하는 작은 진동과 함께 드론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작동되는 건가?”

드론의 렌즈가 강민을 응시하더니,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용자 인식. 시스템 재부팅 완료. 드론 ‘에코(Echo)’입니다. 현재 생존 가능성 0.001% 미만. 데이터베이스 손상. 초기화 권장.”

강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을 한다고? 에코라고?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미확인 사용자입니다. 그러나 인간 생체 신호 일치율 99% 이상. 긴급 생존 모드 가동.” 에코는 그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주어진 프로토콜에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생존 모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강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에코는 잠시 침묵하더니, 렌즈에서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데이터 손실. 복구 중. 단편적인 기록 발견. 22세기 중반, 대규모 환경 재앙 발생. 문명 붕괴. 인류 생존율 극히 저조.”

22세기 중반이라니. 강민은 자신이 타임슬립을 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끔찍한 현실이었다.

“그럼 여긴 안전해? 식수나 식량은? 다른 사람은…?”

에코는 천천히 회전하며 주변을 스캔했다. “이 구역은 안전 등급 ‘주의’로 분류됩니다. 독성 물질 잔류 가능성 높음. 식수원은 5km 북서쪽에 위치한 지하수 정화 시설 예상. 식량원은 확인 불가. 인간 생체 신호 없음.”

“5km….” 강민은 막막함에 한숨을 쉬었다. “혼자란 말인가. 그럼 너는? 나랑 같이 갈 수 있어?”

“본 드론은 사용자의 생존 가능성 향상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이동 가능합니다. 그러나 에너지 잔량 15%. 외부 충전 필요.”

“좋아, 일단 나를 따라와. 밖으로 나가자.”

강민은 에코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드론은 그의 주위를 맴돌며 주변 환경 정보를 알려주었다.

“좌측 건물 잔해, 낙하 위험 30%. 우측 통로, 유독 가스 농도 ‘높음’.”

그는 에코의 경고에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먼지투성이 거리를 걷는 동안,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처참한 폐허뿐이었다. 건물 외벽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들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고, 거대한 덩굴 식물들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들은 오래된 고가도로 아래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에코가 렌즈를 붉게 물들이며 경고했다.

“경고! 미확인 생명체 접근 중! 속도 빠름!”

강민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어디선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발톱 소리. 고가도로 기둥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덩치는 소만 했고, 온몸은 거친 털로 뒤덮여 있었다. 놈의 눈은 핏빛으로 번뜩였고,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마치 늑대와 곰을 합쳐 놓은 듯한 끔찍한 형상이었다.

“빌어먹을… 이런 괴물도 있다고?” 강민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공구 주머니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렌치를 움켜쥐었다.

괴물은 그들을 발견하고는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강민은 옆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놈의 발톱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깊게 파헤쳤다.

“에코! 약점은 없어?”

“데이터 손상으로 정보 불확실. 그러나 동물의 특성을 고려할 때, 머리나 다리 관절 부분이 취약할 가능성 높음!”

강민은 괴물의 공격을 피하며 렌치를 단단히 쥐었다. 그는 소방관 시절 겪었던 훈련들을 떠올렸다. 위급 상황에서 몸을 움직이는 법,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법. 그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괴물이 다시 달려들었다. 강민은 놈의 덩치에 비해 느린 움직임을 간파하고 몸을 틀어 왼쪽 다리를 향해 렌치를 휘둘렀다.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그의 공격이 어느 정도 유효했던 것이다.

괴물은 분노한 듯 더욱 거세게 달려들었다. 강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괴물의 공격을 받아내고 피하며, 기회를 엿봤다. 에코는 계속해서 비상등을 깜빡이며 경고를 보냈다.

“에너지 잔량 5% 미만! 드론 기능 정지 예정!”

“젠장, 버텨! 조금만 더!”

괴물이 마지막으로 달려드는 순간, 강민은 몸을 낮춰 놈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실어 렌치로 괴물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던 괴물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강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는 쓰러진 괴물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살아… 남았군.”

그때 에코가 마지막 힘을 짜내듯 말했다. “사용자 생존 확인. 에코, 전력 소진. 시스템 종료….”

드론은 마지막 깜빡임을 남기고 허공에서 스르르 추락했다. 강민은 재빨리 에코를 받아들었다. 렌즈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고마워, 에코. 너 덕분이야.”

그는 잠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이곳은 그의 새로운 현실이었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잔혹한 현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알 수 없는 희망을 느꼈다. 자신이 싸워서 이겨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옆에 잠시나마 자신을 도울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강민은 에코를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언젠가 다시 고쳐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몸은 여전히 지쳐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북서쪽을 향했다.

“지하수 정화 시설. 그곳으로 간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황폐해진 세상에서, 그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유를 찾을 것이다. 왜 그가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 남아있는 희망은 무엇인지. 거대한 회색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강민의 굳건한 발걸음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