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후는 눈을 비볐다. 분명 방금 전까지 손에 들고 있던 펜이 사라졌다. 책상 위를 아무리 뒤져봐도 보이지 않는다. 고작 몇 초 전의 일이었다.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한가. 요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부엌으로 향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물을 끓이려고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짤깍, 불꽃이 튀며 파란 불이 피어올랐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차를 마실 컵을 꺼내려 선반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하다. 어제 분명 이 자리에 가장 아끼는 찻잔을 넣어두었는데. 지후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른 선반을 열어 보았다. 그곳에는 찻잔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내가 옮겼나…?”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건망증이 부쩍 심해진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어딘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분명 난방을 틀었는데도 불구하고 공기가 차가웠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밖에서는 늦은 밤 도시의 소음조차 잠잠했다. 적막강산.
그때였다. 거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심장이 발바닥까지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 설마 도둑인가? 아니, 이런 고층 아파트에. 그리고 방금 들린 소리는 뭔가 무거운 것이 바닥에 떨어진 소리 같았다. 지후는 숨을 죽이고 부엌칼을 움켜쥐었다. 손잡이에서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거실로 향하는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거실 등은 꺼져 있었고, 창밖의 희미한 불빛만이 내부를 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다. 지후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복도를 지나 거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지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거대한 스탠드 조명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갓은 찌그러졌고, 전구는 산산조각 나 있었다. 지후는 눈을 비볐다.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다시 떠도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뭐…야.”
목소리가 쥐어짜듯이 나왔다. 지후는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깨진 전구 파편이 발에 밟힐까 봐 조심하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들어올 틈도,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그런데 스탠드 조명은 마치 누군가 집어던진 것처럼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그 순간, 지후의 눈이 거실 벽 한편에 꽂혔다. 그곳에는 지후가 어제 거실 벽에 걸어둔 액자가 있었다. 풍경화가 담긴 액자였다. 그런데 액자의 유리가 깨져 있었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고, 액자 속 풍경화에는 마치 손톱으로 할퀸 듯한 선명한 자국이 세 줄 그어져 있었다.
지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건 꿈인가? 아니면 누가 나를 속이는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하지만 어떤 카메라맨이 이렇게 완벽하게 숨어들어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누구… 없어?”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등 뒤에서 서늘한 한기가 다시 한번 훅 끼쳐왔다. 이번에는 단순한 차가움이 아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얼어붙을 것 같은 싸늘함. 지후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다. 존재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째깍, 째깍. 마치 지후의 심장 박동에 맞춰 울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안방에서 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스르륵. 마치 거친 손이 문을 밀어 여는 듯한 섬뜩한 마찰음이었다. 지후는 부엌칼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젠장…!”
지후는 비명을 지르듯 욕을 내뱉으며 안방으로 향했다. 문은 절반쯤 열려 있었다. 침실 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침대 위 이불이 잔뜩 헝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그 위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친 것처럼.
그 순간, 지후는 침대 옆 협탁 위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휴대폰이었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지후는 홀린 듯 휴대폰으로 다가갔다. 화면에는 메시지 앱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입력 창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나가.’
지후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손에 든 칼을 놓칠 뻔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누가? 누가 이 글자를 입력한 거지? 나는 휴대폰을 침대 옆에 뒀을 뿐인데.
그때, 휴대폰 화면이 툭, 하고 꺼졌다. 동시에, 침대 아래에서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기어 나오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지후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둠 속에서, 침대 아래에서, 마치 짐승의 숨소리 같은 거친 호흡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거기… 누구야.”
지후의 목소리는 너무나 가늘고 떨려서, 본인조차 자신의 목소리라고 믿기 힘들었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호흡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지고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지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검고 흐릿한 형체가 침대 아래에서 천천히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차가운 손가락이 지후의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에 지후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동시에 침대 아래에서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내 집이야.”
지후는 비명을 지르며 발목을 잡은 손길을 뿌리쳤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부엌칼은 손에서 미끄러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눈앞의 어둠 속에서, 방금 전 자신을 잡았던 그 존재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희미한 달빛이 침실을 비추자, 침대 아래에서 기어 나온 것은…
거꾸로 매달린, 창백한 얼굴이었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아 있었고, 눈은 마치 그림자를 품은 듯 깊고 어두웠다. 그 얼굴이 지후를 향해 섬뜩하게 웃었다.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널 죽일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