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도시, 잿빛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숨소리는 더욱 가늘게 떨렸다. 썩은 살 냄새와 먼지, 그리고 죽음의 침묵만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이젠 깡통 하나도 찾기 힘드네.”
지혁은 낡은 서가를 힘껏 밀어젖혔다. 퀴퀴한 종이 먼지가 훅 끼쳐와 기침을 참았다. 고층 빌딩의 잔해가 흉물처럼 서 있는 바깥과 달리, 이곳 지하 도서관은 그나마 좀비의 습격을 덜 받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 이미 여러 생존자 무리가 훑고 간 뒤라 눈에 띄는 식량이나 보급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뒤에서 수아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허탕이에요, 오빠. 이대로 가다간….”
“닥쳐, 수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 강팀장의 목소리는 항상 무쇠처럼 단단했지만, 그의 눈빛은 깊은 피로를 감추지 못했다. 탄창엔 남은 총알이 다섯 발, 비상식량은 이틀 치. 고작 세 명의 팀이 버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었다.
그때였다. 쿵! 쿵! 저 멀리 복도에서 둔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좀비들의 움직임이었다. 그것들은 느렸지만 끈질겼고, 무엇보다 수를 예측할 수 없었다.
“젠장, 또 몰려오는군!” 강팀장이 샷건을 움켜쥐었다. “후퇴한다! 지혁, 수아, 서둘러!”
지혁은 주변을 살폈다. 원래 계획했던 탈출구는 이미 좀비들에게 막혔을 터였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붕괴 직전의 낡은 서가뿐. 그때 지혁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팀장님, 여기요!”
서가의 가장 안쪽, 무너진 벽면 뒤편으로 이질적인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곰팡이가 가득한 벽 틈새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혁은 망설임 없이 손전등을 비췄다. 흙먼지로 뒤덮인 그곳에는 오래된 나무 선반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고, 그 뒤로 거대한 바위가 박혀 있었다. 바위가 아니라,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문이었다.
수아가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런 곳에… 문이 있었네요? 지도에도 없던 곳인데…”
강팀장이 석문을 살펴보았다. “인위적으로 막아놓은 것 같군. 아마도 세상이 멸망하기 훨씬 전에, 누군가 고의로 숨긴 곳일 거야.” 그는 문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안에서… 뭔가 느껴진다.”
밖에서는 좀비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지혁은 무거운 석문을 밀어보았다. 끽! 끽! 거친 마찰음과 함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렸다.
매캐한 먼지 대신, 서늘하고 맑은 공기가 확 끼쳐왔다. 동굴이라기엔 너무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통로였다. 통로를 따라 이어진 벽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수아가 주춤거렸다.
“일단 들어가자! 밖에서 죽는 것보단 나아!” 강팀장이 결단력 있게 외쳤다.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통로는 생각보다 깊었다. 손전등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맴도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걸었을까, 통로의 끝에서 둥근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천장은 돔 형태로 깎여 있었고, 바닥은 매끄러운 검은 돌로 마감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간의 정중앙에 거대한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은 수많은 고대 문자로 뒤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어두운 푸른빛을 희미하게 내뿜는 수정 구슬이 놓여 있었다.
구슬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쿵, 쿵,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푸른빛은 너무나 영롱해서 지혁은 잠시 모든 것을 잊고 홀린 듯 구슬을 응시했다.
“저게… 대체 뭘까요?” 수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함부로 손대지 마라.” 강팀장이 경고했지만, 그의 눈빛 역시 구슬에 사로잡힌 듯했다.
지혁은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렸다. 위험하다고 직감했지만, 동시에 강렬한 희망이 그의 심장을 두드렸다. 그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천천히 제단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푸른 구슬의 표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싸늘하면서도 묘하게 따뜻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듯, 구슬의 푸른빛이 일순간 강렬하게 폭발했다. 휘이이잉! 웅장한 진동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바로 그때, 밖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썩어가는 살덩이들이 쿵, 쿵, 쿵, 하고 도서관 안으로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지혁, 위험해!” 강팀장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구슬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푸른빛은 지혁을 감싸 안고, 그의 손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눈앞에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춤을 추며 지나가는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석문 밖에서 도서관 복도로 진입하려던 좀비들이 일순간 뒤로 밀려났다. 놈들은 이해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밀쳐진 듯 비틀거렸고, 그 자리에 투명한 벽이 생긴 듯 앞이 막혀버렸다. 으르렁거리는 좀비들이 투명한 벽을 향해 썩은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들의 공격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이게… 이게 뭐야?!” 수아가 경악하여 외쳤다.
강팀장은 샷건을 움켜쥔 채 얼어붙은 듯 지혁과 구슬, 그리고 밖의 좀비들을 번갈아 보았다. 투명한 벽 너머로 좀비들의 끈질긴 몸부림이 보였지만, 그 어떤 놈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지혁은 자신의 손과 구슬을 번갈아 보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찾아왔다. 이 구슬… 이 마법 같은 힘이 과연 무엇일까?
구슬의 푸른빛이 서서히 약해지며 투명한 벽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으르렁거리는 좀비들의 소리가 다시 선명하게 들려왔다. 투명한 벽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혁, 어서! 시간이 없어!” 강팀장이 외쳤다. “그 구슬… 가지고 가야 해!”
지혁은 망설임 없이 구슬을 움켜쥐었다. 차가우면서도 강력한 에너지가 그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알 수 없는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이 구슬이 과연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 될까, 아니면 이 파멸적인 세상에 더 큰 재앙을 가져올 전조일까.
그들은 미지의 힘을 품은 채, 다시 한번 피와 절규로 가득 찬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딜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