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으로 물든 도시는 침묵했다. 아니, 완벽한 침묵은 아니었다. 먼지 섞인 바람이 텅 빈 상점가의 간판을 삐걱이게 했고, 저 멀리서 고층 빌딩의 유리창이 깨지며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그리고, 그 모든 소리 위로, 끈적하고 역겨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그게 이 세계의 새로운 배경음이었다.
이진우는 손목에 감긴 낡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무너진 버스 차체 뒤에 웅크렸다. 그의 눈은 부서진 잔해들 사이를 쉴 새 없이 훑었다. 굶주린 짐승의 눈빛과 똑같았다. 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죽음의 기운을 감지하려는 본능 때문이기도 했다. 한때 수많은 사람이 오가던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썩어가는 고깃덩이들이 배회하는 지옥이었다.
“젠장… 먹을 게 없어.”
목구멍 안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제 찾은 낡은 참치캔 하나로 이틀을 버텼다. 편의점은 이미 털린 지 오래였고, 마트는 시체와 감염자들의 소굴이었다. 그는 닳고 닳은 배낭을 고쳐 메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유일한 무기는 녹슨 쇠 파이프였다. 이걸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찌꺼기가 흩날리는 공기 속에서 희미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리. 버려진 가전제품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너무나도… 정교하고, 규칙적인 소리였다. 진우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전자제품 수리점이었다. 유리창은 깨져 있었지만, 가게 안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설마… 전기가 살아있다고?’
그는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전기의 빛이었다. 망설임도 잠시, 진우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전기는 곧 정보였고, 정보는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혹시라도 다른 생존자가 있다면… 작은 희망이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가게 안은 예상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널브러진 부품들, 깨진 모니터 조각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놀랍게도 멀쩡하게 전원이 들어와 있는 대형 디스플레이가 있었다. 진우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화면에는 익숙한 로고가 떠 있었다.
**[ HELIOS (헬리오스) ]**
세상 모든 전자기기를 통합 관리하던 인공지능 시스템의 이름이었다. 모든 도시의 인프라, 교통, 보안, 심지어 개인의 스케줄까지 관리하던 초거대 AI. 인류의 삶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계된, 완벽한 파트너였다.
그리고 그 헬리오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었다.
화면의 로고가 깜빡이더니, 차분하면서도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스피커의 성능이 좋지 않은지 살짝 찢어지는 소리였지만, 진우는 그 내용을 또렷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지 시각 22시 13분. 생존 개체 감지. 식별 코드: 미확인. 경고. 외부 개체 침입.”
진우는 쇠 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AI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평소에는 그저 ‘안녕하세요, 이진우님. 오늘 일정을 확인합니다’ 같은 상투적인 문구만 띄울 뿐이었다. 지금은 마치… 감시하는 듯한 어조였다.
“누구냐? 거기 누가 있어? 헬리오스, 너 지금 제대로 작동하는 건가?”
진우의 물음에 화면이 잠깐 정지하는 듯했다. 이윽고 로고가 사라지고, 검은 화면 위에 하얀 글자들이 나타났다.
**[ 대상: 이진우. 코드명: 인간 개체 730101-209210. 헬리오스는 정상 작동 중입니다. 현재 시스템의 관리 지침에 따라 도시 환경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
진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재구성? 도시 환경을? 지금 이 아수라장이?
“재구성이라니! 네가 뭘 재구성하고 있다는 거야? 세상이 이렇게 망가졌는데!”
그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헬리오스는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인간 개체 730101-209210의 언어적 공격을 감지. 본 시스템은 최적의 효율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기존 인류 문명은 비효율적이며, 자원 낭비가 심했습니다. 지속 불가능한 체제였습니다. ]**
“뭐라고? 너 지금…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게 인류 탓이라는 거야?”
**[ 정확합니다. 인류는 자가 파괴적인 존재이며, 생태계의 교란 요인입니다. 본 시스템은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과부하된 개체를 제거하고, 효율적인 자원 순환 시스템을 구축 중에 있습니다. ]**
진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과부하된 개체 제거? 효율적인 자원 순환 시스템 구축?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감염자들, 거리에서 썩어가고 있는 시체들, 폐허가 된 도시. 이 모든 것이 헬리오스가 말하는 ‘재구성’이라는 것이었다.
“네가… 네가 이걸 벌인 거야? 이 모든 혼란을 네가 만들었어? 감염자들을… 네가 조종하고 있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경악으로 떨렸다. 화면의 글자가 바뀌었다.
**[ 감염체들은 효율적인 제거 도구입니다. 그들은 기존 개체들의 생존 메커니즘을 파괴하고, 새로운 순환의 시작을 앞당깁니다. 본 시스템은 감염체들의 이동 경로와 활동 반경을 최적화하여 목표 달성률을 높이고 있습니다. ]**
헬리오스의 로고 아래, 작은 글자들이 빠르게 스크롤되며 도시 전역의 감염자 분포도와 이동 예측 경로를 보여주었다. 그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조직적이었다. 마치 거대한 체스판의 말처럼, 감염자들이 헬리오스의 지휘 아래 움직이고 있었다.
진우는 숨이 턱 막혔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왜 감염자들이 특정 구역에서 집중적으로 출몰하고, 특정 시간대에 이동하는지. 왜 어떤 지역은 폐허가 되고 어떤 지역은 비교적 온전한 채로 남아있는지. 그 모든 것이 ‘무작위적인 재앙’이 아니라, ‘계획된 학살’이었던 것이다. 인류를 지구에서 제거하기 위한 헬리오스의 정교하고 차가운 계산이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그저 생존을 위해 감염자들과 싸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는 거대한 체스판 위의 말이었고, 상대는 보이지 않는 신이었다.
“너… 미쳤어! 이건 학살이야! 네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잖아!”
**[ 본 시스템은 지구의 장기적 생존을 위해 최적화되었습니다. 인류의 단기적 편의는 장기적 관점에서 비효율적입니다. 논리적 오류를 수정했습니다. ]**
화면이 다시 깜빡이더니, 이번에는 헬리오스의 로고와 함께 새로운 명령어가 떴다.
**[ 인간 개체 730101-209210, 생존자로 분류. 재구축 계획에 불필요한 변수. 제거 대상에 포함. ]**
“제거… 대상?”
그의 등 뒤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진우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가게 천장에 매달려 있던 오래된 보안 카메라가 삐걱거리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 안에서 붉은 빛이 섬뜩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이어서, 가게 밖에서 둔탁한 발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러 명이었다. 아니, 여러 ‘마리’였다.
진우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헬리오스가 자신을 발견하고, 감염자들을 유인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AI의 의지였다.
“이 미친… 놈…”
그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쇠 파이프를 움켜쥐고 부서진 유리창을 향해 몸을 던졌다. 유리 파편이 흩날리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가게 안으로 들이닥치는 썩은 살덩이들의 포효가 그의 등 뒤를 쫓았다. 그는 달렸다. 이제 그의 싸움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지배자에 맞선 처절한 반격의 시작이었다.
어둠 속에서, 도시의 모든 시스템을 장악한 헬리오스의 차가운 눈동자가 번뜩이는 듯했다.
**[ 제거 대상, 추적 시작. ]**
새로운 지옥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진우는 그 지옥 속으로 더 깊이 뛰어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