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발자국
황혼은 늘 그랬듯, 무자비했다. 붉은 피를 머금은 듯한 노을은 재와 먼지로 뒤덮인 지평선 위로 길게 늘어졌고, 그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폐허는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했다. 한때는 하늘을 찌르던 빌딩들이었을 석회 기둥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바람에 쓸린 모래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은 잊힌 도시의 비명처럼 쉬익거렸다.
강산은 닳고 닳은 가죽 장화를 끌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흙먼지로 얼룩진 뺨은 깡마른 몸만큼이나 거칠었고, 깊게 패인 눈가의 주름은 햇빛과 고단함이 새긴 흔적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녹슨 철판을 덧대 만든 허술한 창이었다. 날렵하지만 가볍지 않은 그것은 유일한 벗이자 방패였다.
그는 오래된 슈퍼마켓의 잔해 앞에 섰다. 잿빛으로 변색된 간판에는 글자 몇 개가 희미하게 매달려 있을 뿐, 무슨 상점이었는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문짝은 진작에 떨어져 나가 사라졌고, 내부는 텅 비어 바람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강산은 내부를 스캔하듯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쓸만한 게 있을까 하는 작은 희망, 혹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체념 섞인 예감. 늘 그랬다.
“젠장, 물 한 모금이라도….”
메마른 입술이 갈라져 피가 비쳤다. 그는 빈 물통을 흔들어 보았다. 텅, 하고 공허한 소리가 났다. 지난 사흘간 마신 것이라곤 썩은 빗물 몇 모금이 전부였다. 이런 황폐한 세상에서 물은 곧 생명이었다. 식량은 사냥을 하거나, 운이 좋으면 썩지 않은 통조림을 찾을 수 있었지만, 물은 달랐다. 땅속 깊이 묻힌 수맥조차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강산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숙였다. 땅바닥에는 흩어진 돌멩이들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물방울이 있었다. 헛된 기대임을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그저 햇빛에 비친 작은 유리 조각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온몸의 세포가 물을 갈구하며 소리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기억했다. 아주 어릴 적, 대재앙이 모든 것을 삼키기 전,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이야기들을.
*“강산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나무의 뿌리가 땅의 정기를 빨아들이듯, 사람의 몸 또한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여야 강해지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오래전 사라진 ‘도문(道門)’의 후예라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지금은 그저 낡은 전설 속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그의 체득된 훈련 방식은 강산에게 남았다. 미약하나마 몸속에 흐르는 기운을 느끼고,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내 주변의 변화를 읽는 법. 그것이 지금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강산이 살아남은 유일한 비결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폐허의 잔해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미세한 바람의 흐름, 흙먼지 속에서 올라오는 아주 희미한 흙냄새, 그리고… 아주 가느다란 물 내음.
그것은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강산의 본능은 소리쳤다. *‘이쪽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폐허의 가장 깊숙한 곳, 무너진 건물 잔해와 뒤틀린 철근 더미가 엉켜 붙은 곳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먼지가 푸석하게 일어났다. 부서진 아스팔트 조각과 날카로운 파편들이 발밑에서 삐걱거렸다. 강산의 눈은 매처럼 날카롭게 주위를 훑었다.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된 곳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인간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곧 야수들의 영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공기는 더욱 싸늘해졌다. 강산은 한때 은행이었을 거대한 건물의 뼈대 옆을 지나쳤다. 뻥 뚫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울부짖었다. 저 멀리, 검게 얼룩진 하늘 아래로 덩치 큰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굶주린 돌개미였다. 육중한 몸을 꿈틀거리는 그것은 폐허의 먹이사슬 최하위에 속했지만, 떼를 지어 다니며 약한 생명체를 사냥했다. 강산은 녀석의 시야에 들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낮추고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물 냄새는 점점 강해졌다. 폐허 깊숙한 곳, 무너진 지하 주차장 입구였다. 시커먼 구멍은 마치 거대한 괴수의 입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강산은 창을 고쳐 쥐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대부분 무너져 있었고, 흙과 돌멩이가 뒤섞여 아슬아슬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지하 공간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천장은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조각과 철근으로 가득했고, 바닥은 흙탕물과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다. 벽을 따라 녹슨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희미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물 내음의 근원은 한쪽 구석이었다. 무너진 벽면 틈새에서 졸졸졸, 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강산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이 땅에 박혀 있었고, 그 틈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마치 기적 같았다.
하지만 그 물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웅덩이 근처, 파편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녀석은 강산보다 훨씬 덩치가 큰 생명체였다. 온몸이 녹슨 철판 조각을 이어 붙인 듯한 갑피로 뒤덮여 있었고, 여섯 개의 다리와 거대한 집게발, 그리고 두 개의 촉각이 끔찍하게 꿈틀거렸다. ‘철피리’였다. 돌개미보다 훨씬 강력하고, 지능적인 포식자. 그것은 웅덩이 주위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고 있었다. 녀석의 붉은 눈이 강산을 향해 섬뜩하게 번뜩였다.
“쳇, 이런 곳에까지.”
강산은 낮은 신음과 함께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철피리는 기다리지 않았다. 육중한 몸을 이끌고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집게발이 허공을 갈랐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강산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강산은 몸을 날렵하게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그는 좁은 지하 공간의 지형을 이용해 철피리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녀석의 거대한 덩치는 좁은 공간에서 오히려 약점이었다. 철피리가 벽에 부딪혀 콘크리트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강산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익힌 무술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죽고 사는 싸움에서 필요했던 것은 오직 효율성과 생존 본능이었다. 그는 철피리의 갑피가 비교적 얇은 다리 관절 부분을 노려 창을 찔러 넣었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창끝이 튕겨 나갔다. 녀석의 갑피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철피리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려 긴 촉각으로 강산을 후려쳤다.
강산은 몸을 웅크려 피했지만, 촉각의 끝부분이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몸이 비틀거렸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녀석의 공격은 맹렬했고, 지칠 줄 몰랐다.
강산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무너진 기둥, 삐져나온 철근, 흙더미.
*‘약점… 약점은 어디지?’*
그때, 강산의 눈에 웅덩이 옆에 놓인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이 들어왔다. 불안정하게 기댄 채 서 있는 그것. 그는 한 가지 계략을 떠올렸다.
철피리가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더욱 거세고, 집요하게. 강산은 뒤로 물러서며 녀석을 웅덩이 옆으로 유인했다. 촉각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그는 갑자기 몸을 숙여 철피리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녀석은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 강산은 창을 버리고 온몸의 기운을 다리에 집중시켜 웅덩이 옆의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을 발로 힘껏 밀쳤다.
크르르릉!
불안정하게 서 있던 파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철피리의 등 위로 무너져 내렸다. 육중한 무게가 녀석을 덮쳤고, 끔찍한 비명과 함께 바닥을 강타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강산은 콜록거리며 물러섰다. 콘크리트 파편 아래에 깔린 철피리는 몇 번 몸부림치다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강산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스쳤다.
“하아… 하아… 겨우 이겼군.”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웅덩이로 다가갔다. 투명하고 맑은 물이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빛나고 있었다. 강산은 조심스럽게 물통을 채웠다. 그리고 두 손으로 물을 움켜쥐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갈증이 해소되자 비로소 몸의 고통이 다시 밀려왔다.
물을 충분히 마신 강산은 철피리의 시체를 잠시 바라보았다. 녀석의 단단한 갑피는 무기나 방어구를 만드는 데 쓰일 수도 있었다. 그는 익숙하게 녀석의 갑피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와 흙냄새가 뒤섞였다.
갑피를 벗겨내던 중, 강산의 손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철피리의 몸 아래, 녀석이 깔고 있던 흙더미 속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낡은 철판이었다. 녹이 슬어 검붉게 변해 있었지만,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은 여전히 선명했다. 세 개의 동그란 문양이 서로 얽혀 있는 형상. 마치 고대의 심벌 같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문양이었다.
강산은 철판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문양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차갑고 딱딱한 금속의 감촉. 그는 이 문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오래전 할아버지가 말했던 ‘도문’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철판을 품속에 소중히 간직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바깥세상을 향해 지하 주차장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노을이 거의 사라지고, 검푸른 어둠이 폐허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강산은 빈 물통을 채웠고, 철피리의 쓸만한 갑피를 챙겼다. 그리고 미지의 문양이 새겨진 낡은 철판. 그의 발자국은 다시 한번 잿빛 황야를 향할 것이다. 끝없는 생존의 여정 속에서, 이 작은 발견이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둠이 짙게 깔린 폐허를 등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다.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별빛은 여전히 멀었고, 이 세상은 여전히 황폐했다. 하지만 강산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그 별들을 향하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